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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May 27. 2016

천천히 읽지 못했던 이야기

실망할까 짧아진 우리 사랑

책장 곁에 앉아 한 권씩 한 권씩 책을 꺼내어 본다.

밑줄 그어진 구절은 소리 내 읽어 보기도 하고, 

접힌 페이지를 만나면 다시 펼쳐 주면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자스민차를 옆에 두고서 무료함이 싫지 않은 저녁을 보내고 있었는데

맨 끝에 꽂혀있던 책을 열면서 나는 당신의 흔적을 발견했어.


책 귀퉁이에 그려진 아주 작은 그림들.

한 장 한장은 그저 낙서 같지만 

샤라라락 한 번에 넘기면 꼭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그림.



그 영화 생각나지? 

국어 교사였던 남자의 학교에 찾아갔던 여자가 

교실 벽에 붙어 있던 시를 보더니 '천득이가 누구냐'고 했던.

그 장면에서 우리 빵 터져선 같이 웃었잖아.

나중에 여자는 너네반 천득이가 쓴 거라면서 책을 주는데 

남자가 건네는 것도 똑같은 책이었고. 따지면 다르긴 했지. 

남자는 귀퉁이에 그림을 그려서 준 거니까. 


너무 멋지다고 지나가면서 말했던 거 같은데

어느 날 너는 납작하게 포장된 걸 하나 주면서 오다 주웠다고 그랬잖아.

지금은 풀지 말고 집에 가서 뜯어보라고 하면서.


지렁이 같은 글씨를 적는 네가 그 조그만걸 그려 넣었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귀여워서, 나는 읽을 생각은 하지 않고 

키득거리면서 자꾸만 손으로 샤라락 샤라락 책을 훑었어.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을 때는 술술 읽혀서

두 시간 만에 다 읽어 버렸고. 네가 준 책, 단편 소설집이었으니까. 



"책 한 권을 삼 년 동안 읽으라면 할 수 있겠어?"

며칠 전엔가 친구가 대뜸 물어봐서 

나는 어떤 책이냐에 따라서 달라질 거 같다고 했는데


"소설이라면?"

되돌아 오는 친구의 말에 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어.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 소설은 이게 필수잖아.

극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쉬엄쉬엄 읽는 게 말이나 돼?

파바박 집중해서 단숨에 읽어 내려가야지.


친구가 그러는데 일본의 한 고등학교에선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냈대.

한 국어 선생님이 교과서 대신 <은수저>라는 일본 작가의 소설을 가지고 3년 동안 수업을 했는데

더 신기한 건 이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이 명문대에 많이 진학했다는 거야.


소설에서 연을 날리면 직접 연을 만들어서 날리고, 

초밥집이 나오면 '물고기 어'가 들어가는 600여 개의 한자를 찾아보기도 했대.

차를 타면 금방일 거리를 음미하며 걸어가는 법을 배웠던 거지. 

무언가 깊이 파내려 갔던 이 경험이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만들어 줬대나봐. '벽을 계단으로 만드는 힘'을 말이야.


나는 뒷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그랬어.

"저 학생들 훌쩍 나이를 먹어서 그 책 본 적이 있을까.

지겹게 봤을 표지를 열고 이미 너무 잘 아는 글귀를 또 읽고 싶을까.

난 어쩐지 그 책이 가여워."


"너는 참 안 변해. 너답다 너다워. 참 너다운 생각이야."

이번엔 친구가 고개를 저으면서 그러더라고.


인정하긴 싫지만 맞는 말이긴 해. 걱정이 앞서는 사람.

당신을 만나던 그때도 나는 그랬어. 

시간의 힘이 주는 인내심, 강인함보다 

지루함이 커져서 보기 싫은 존재가 되는 걸 더 염려했던 거 같아.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던 어느 시인의 말이 나는 참 불안했어. 

그래서 그렇게 너를 막아섰던 건가 봐. 자세히 나를 알고 나면 실망할까 봐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책이 될까 봐서.


너는 편안하게 나를 지켜보길 원했고, 나는 전전긍긍 숨기기 바빴고.

아름답게 물드는 석양빛 아래에서 서로 다른 이유로 힘들어했으니까.

우리는 결국 벽 앞에서 쉽게 손을 놓쳤고.


나는 왜 홀랑 당신과의 시간을 넘겼던 걸까.

아마도 당신이 처음이라서, 나의 속을 깊게 보고 싶어 했던 사람.


천천히 오래 두고 읽지 못했던, 나와 당신의 이야기를 오늘은 더디게 넘겨 보려 합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너무 짧게 느껴지는 것 같아 나는 슬퍼지려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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