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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May 26. 2017

불안한 당신을 지키는 사공

사랑의 균형잡기

오후 내내 너는 뾰로통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 있어?

뭐 기분 나쁜 일 있었구나?

어디 아픈 건 아니고?


다 아니라는데 사실은 

아닌 게 아닌 거 눈치채고 있었어.


밥을 먹고 자리를 옮겨선

창백해진 안색으로 너는 자꾸만 앞에 놓인

휴지를 조각조각 찢기 시작했지.


애꾿은 휴지조각들이 쌓여 가는 것도

네가 하고 싶은 말이

꽤 어려운 말이란 거, 이제 난 알고 있어.


"몸 안좋으면 오늘은 일찍 들어가는 게 어때?"

그런 네가 걱정이 돼서 물었는데

날이 선 목소리로 너는 그랬어.


"다른 약속 있어?

왜 자꾸 보내려고 그래?

내가 갔으면 좋겠어?"



잔뜩 웅크린 채로 가시를 세우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고슴도치처럼. 

가시에 얼굴을 숨기는 게 

최선의 방어라 믿는 사람.


그게 너란 사람이란 거, 잘 알고 있어서.

찔릴 법한 날에도 내가 더 안아 주면 되니까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그게 좀 아팠어.


오늘 같은 얼굴

나는 여러 번 봐서 알고 있어.


아마도 너의 주변 누군가가

이별을 겪었을 테지.

그런 날이면 네 눈망울은

비오기 전 하늘과 닮아 있어서

툭하고 비가 쏟아지진 않을까

조마조마했었어.


그러다 헤어지기 전에 너는

꾹 담아두었던 말을 간신히 꺼냈지.


"언제든 말야.

내가 싫어지거나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을 때가 오면 

그때 꼭 먼저 말해줘.


내가 상처받을까 숨기지도 말고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지나가는 감정으로 여기지도 말고 

미안해서 힘들어하지도 말고.


괜찮으니까 단숨에 꼭 얘기해줘."



순간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거 같았지만 

나는 최대한 미소를 지으면서 너한테 그랬지.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어디 있냐고

또 그런 말 하면 그땐 진짜 화낸다고.


미안하다고 

다신 안 그러겠다고

너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하더니

아파트 입구 속으로 힘없이 사라졌어.


엘리베이터가 15층에 도착할 때까지

니방에 불이 켜지고

집이라는 문자가 올 때까지

나는 한동안 집에 갈 생각은 않고 

너를 올려다보고 있었어. 


나 어릴 때 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강아지를 맡긴 적이 있었어.

멀리 사는 삼촌네에 가신다고

보름 정도 잘 보살피라고 하셨거든.


꼬박꼬박 산책도 시켜주고 밥도 챙겨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해야 하는데

나는 친구들이랑 나가 노는 게 좋아서

제대로 놀아주지도 않았어.


낯선 환경에 놓이면

낯설어하거나 겁을 먹을 텐데 

신기하게도 그 강아지는 온 집을 

동동거리고 돌아다니면서 제집인양

너무 잘 지내는 거야.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소리 내 짓지도 않고.

울보인 내 동생보다 더 의젓했지.


다른 가족들에 비해서 

나는 별로 이뻐해 주지도 않았는데 

하루는 TV를 보고 있던 내 무릎에

척하니 올라와서 걔도 같이 텔레비전을 보더라고.


누군가 문을 여는 인기척이라도 들리면

거실 구석에 앉아 있다가 

쪼르르 달려오기도 하고 말야.



난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어.

너무 평온한 몸짓으로 우리 집 일상에 들어와 있잖아.


적응이란 거 

시간이 필요한 일이니까.

그놈 참 넉살 좋다고 생각했지.


근데 말이야.

어쩌면 그 강아지는 붙임성 좋고 활달한 녀석이 아닐지 몰라.

지극정성으로 예뻐해 주고 아껴주는 할머니 곁에서만

쭉 자라와서 그런지 몰라.


어떤 말썽을 피워도 할머니가

자신을 사랑해줄걸 아니까, 

그 누구도 자기를 싫어할 거란 생각은 못하는 거지.

나를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함과 의심은

그래서 조금도 모르는 거야.


그동안 너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왔던 걸까.

아무리 줘도 채울 수 없는 사람이 

너는 돼 버린 걸까.

받지 못하면 줄 수도 없는 게 사랑이라서

언제까지 나는 네 사랑에 허덕여야 하는 걸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체득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행운아다.

끝을 알 순 없겠지만

그 행운은 꽤 오래 

두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나는 꼭 그렇게 할 거야.

시간이 걸리더라도

네가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인지를

꼭 깨닫게 해줄 거야.


우리 사랑에 운이 따라 주지 않으면 어때요.

요행을 바라기보다 때론 성실함이

우리를 지켜줄 거예요.


나는 어리석은 사공이 돼 보려 합니다.

어렵고 가기 힘든 당신이라는 산을

조금씩 조금씩 옮겨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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