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균형잡기
오후 내내 너는 뾰로통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 있어?
뭐 기분 나쁜 일 있었구나?
어디 아픈 건 아니고?
다 아니라는데 사실은
아닌 게 아닌 거 눈치채고 있었어.
밥을 먹고 자리를 옮겨선
창백해진 안색으로 너는 자꾸만 앞에 놓인
휴지를 조각조각 찢기 시작했지.
애꾿은 휴지조각들이 쌓여 가는 것도
네가 하고 싶은 말이
꽤 어려운 말이란 거, 이제 난 알고 있어.
"몸 안좋으면 오늘은 일찍 들어가는 게 어때?"
그런 네가 걱정이 돼서 물었는데
날이 선 목소리로 너는 그랬어.
"다른 약속 있어?
왜 자꾸 보내려고 그래?
내가 갔으면 좋겠어?"
잔뜩 웅크린 채로 가시를 세우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고슴도치처럼.
가시에 얼굴을 숨기는 게
최선의 방어라 믿는 사람.
그게 너란 사람이란 거, 잘 알고 있어서.
찔릴 법한 날에도 내가 더 안아 주면 되니까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그게 좀 아팠어.
오늘 같은 얼굴
나는 여러 번 봐서 알고 있어.
아마도 너의 주변 누군가가
이별을 겪었을 테지.
그런 날이면 네 눈망울은
비오기 전 하늘과 닮아 있어서
툭하고 비가 쏟아지진 않을까
조마조마했었어.
그러다 헤어지기 전에 너는
꾹 담아두었던 말을 간신히 꺼냈지.
"언제든 말야.
내가 싫어지거나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을 때가 오면
그때 꼭 먼저 말해줘.
내가 상처받을까 숨기지도 말고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지나가는 감정으로 여기지도 말고
미안해서 힘들어하지도 말고.
괜찮으니까 단숨에 꼭 얘기해줘."
순간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거 같았지만
나는 최대한 미소를 지으면서 너한테 그랬지.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어디 있냐고
또 그런 말 하면 그땐 진짜 화낸다고.
미안하다고
다신 안 그러겠다고
너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하더니
아파트 입구 속으로 힘없이 사라졌어.
엘리베이터가 15층에 도착할 때까지
니방에 불이 켜지고
집이라는 문자가 올 때까지
나는 한동안 집에 갈 생각은 않고
너를 올려다보고 있었어.
나 어릴 때 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강아지를 맡긴 적이 있었어.
멀리 사는 삼촌네에 가신다고
보름 정도 잘 보살피라고 하셨거든.
꼬박꼬박 산책도 시켜주고 밥도 챙겨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해야 하는데
나는 친구들이랑 나가 노는 게 좋아서
제대로 놀아주지도 않았어.
낯선 환경에 놓이면
낯설어하거나 겁을 먹을 텐데
신기하게도 그 강아지는 온 집을
동동거리고 돌아다니면서 제집인양
너무 잘 지내는 거야.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소리 내 짓지도 않고.
울보인 내 동생보다 더 의젓했지.
다른 가족들에 비해서
나는 별로 이뻐해 주지도 않았는데
하루는 TV를 보고 있던 내 무릎에
척하니 올라와서 걔도 같이 텔레비전을 보더라고.
누군가 문을 여는 인기척이라도 들리면
거실 구석에 앉아 있다가
쪼르르 달려오기도 하고 말야.
난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어.
너무 평온한 몸짓으로 우리 집 일상에 들어와 있잖아.
적응이란 거
시간이 필요한 일이니까.
그놈 참 넉살 좋다고 생각했지.
근데 말이야.
어쩌면 그 강아지는 붙임성 좋고 활달한 녀석이 아닐지 몰라.
지극정성으로 예뻐해 주고 아껴주는 할머니 곁에서만
쭉 자라와서 그런지 몰라.
어떤 말썽을 피워도 할머니가
자신을 사랑해줄걸 아니까,
그 누구도 자기를 싫어할 거란 생각은 못하는 거지.
나를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함과 의심은
그래서 조금도 모르는 거야.
그동안 너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왔던 걸까.
아무리 줘도 채울 수 없는 사람이
너는 돼 버린 걸까.
받지 못하면 줄 수도 없는 게 사랑이라서
언제까지 나는 네 사랑에 허덕여야 하는 걸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체득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행운아다.
끝을 알 순 없겠지만
그 행운은 꽤 오래
두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나는 꼭 그렇게 할 거야.
시간이 걸리더라도
네가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인지를
꼭 깨닫게 해줄 거야.
우리 사랑에 운이 따라 주지 않으면 어때요.
요행을 바라기보다 때론 성실함이
우리를 지켜줄 거예요.
나는 어리석은 사공이 돼 보려 합니다.
어렵고 가기 힘든 당신이라는 산을
조금씩 조금씩 옮겨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