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
어제오늘 날씨가 너무 좋다. 연두색이 점점 짙어진다. 거대한 순환 속, 절대의 지점이자 순간이다. 연두색을 보는 순간의 처음 위치와 나의 의식으로 돌아온 최종 위치 간의 차이를 ‘변위(displacement)’라고 가정해 보자. 그 ‘변위’를 미분微分하면, 연두색이 변해가는 ‘속도’가 되고 그 ‘속도’를 미분하면 연두색이 얼마나 빠르게 변해가는 지를 가늠할 수 있는 ‘가속도’가 된다.
하지만 자연의 변화는 결코 등속운동, 혹은 등가속도 운동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자연의 변화는 측정될 수 없을 만큼 빠르거나 무한 정지 상태일 수 있다. 심지어 진행 방향을 거슬러 반대로 움직이기도 한다. 실제로 자주 경험하지만 자연은 때로 무질서한 상태로 보이기 조차 한다.
일반적으로 점 사이의 거리나 넓이, 부피 따위의 정보를 포함하지 않는 수학적 혹은 공리적 ‘위상공간’에서 자연의 무질서는 해독되지 못할 수도 있다. 하기야 이 무질서는 반드시 해독할 필요조차 없다.
反者, 道之動 弱者, 道之用.(반자, 도지동 약자, 도지용)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
되돌아감은 ‘도’의 움직임이고, ‘연약함(부드러움이라고 해석되기도 함)’이 ‘도’의 쓰임이다.
천하 만물은 유에서 생겨났고 유는 무에서 생겨났다. 『도덕경』 제40 장
이러한 사실을 느꼈을지도 모를 '노자'께서는 문득 되돌림을 ‘도’라고 이야기한다. 되돌림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순리적으로 흘러 본래 자리로 가는, 즉 ‘순환’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도덕경』에서는 이것을 부연하기 위해 '연약함'을 예로 든다. 이것은 자연의 모든 시작을 표상하는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고 눈으로 보는 모든 자연 현상의 시작은 지극히 미약하고 동시에 부드럽다. 도덕경에 자주 등장하는 물(水)의 이미지가 여기에 부합한다. 즉 부드러움이야말로 도의 쓰임이라는 것이다. 도는 부드럽게 시작한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연약함은 반드시 굳세어지고 굳셈은 역시 연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유와 무를 상쇄相殺시켜 서로를 서로의 기원으로 삼는다. 이것은 불교의 논리와 닮아 있다. 법성게(화엄경을 신라 의상 대사가 요약한 화엄일승법계도를 달리 부르는 말이다.)의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지극히 작은 먼지 하나에 우주가 들어있음이요,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모든 먼지들이 모두 다 그와 같다.
무와 유가 합쳐져서 우주가 되고 무와 유가 분리되어 역시 우주가 된다는 것이니 결국 무와 유는 이원적 개념이 아닌 것이다. 무에서 유로 다시 유에서 무로 끝없이 순환하는 것이다.
서양철학의 기원에 해당하는 고대 그리스의 밀레토스 학파에 속한 아낙시만드로스도 이러한 상황을 생각했던지(절대 그럴 리 만무하겠지만) 이런 상태를 '아페이론(무한無限)'이라 불렀다. '아페이론'으로부터 만물이 창조되었으니 아낙시만드로스는 아페이론이 곧 ‘아르케(처음, 시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본질에 대한 생각은 누구든 어떤 상황이든 결국 순환으로 정의될 수밖에 없다. ‘노자’나 ‘아낙시만드로스’나 ‘의상’ 역시 이러한 순환의 모형 속에서 우주와 자연을 이해했을 것이다.
다시 처음의 미분으로 돌아가,
연두색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녹색으로 짙어지고 마침내 다시 떨어지는 지점까지를 변위로 하고 그것을 미분하면 우리 삶의 속도가 되고, 그것을 다시 미분하면 우리 삶의 가속도가 될 것인데, 결국 연두색에서 녹색으로 그리고 갈색으로 변해 떨어지는 것, '유'에서 '무'로 가는, 역으로 다시 '무'에서 '유'로 끝없이 순환하는 실체로서의 우리 삶이 이렇게 증명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