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되도다.

by 김준식
Imbiss mit Zinnkanne, Schinken und Silberbecher, 56cm*87cm, Alte Pinakothek in Munich. 1639.



Vanitas vanitatum, dixit Ecclesiastes,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사적인 이야기지만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하지만 성서를 자주 읽기는 한다. 위 구절은 코헬렛(전도서) 1장 2절의 라틴어 버전이다. 뜻은 대충 이러하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중세 말, 공포의 흑사병이 천지를 휩쓸고 더불어 명분 없는 지루한 종교 전쟁이 당시 민중의 삶을 흔들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삶의 덧없음을 절감하며 어찌어찌 삶을 유지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성경의 이 구절은 당시 사람에게 너무나 다가왔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네덜란드 화가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표현 방법으로 이미지화했다. 그림 이름에 자주 Vanitas가 들어가기도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내 눈에 오늘 이 그림이 유난스레 새롭다. 환멸의 90년대를 보내면서 가졌던 생각들이 처참히 무너지는 2023년 세상의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은빛 잔과 돼지고기, 주석 주전자가 있는 가벼운 식사(Imbiss mit Zinnkanne, Schinken und Silberbecher) 1639, Alte Pinakothek in Munich.


주석으로 만든 주전자(Tinjug, 독일어로는 Zinnkanne)에 비치는 빛의 부드러운 반사, 뒤편으로 이어지는 짙은 그림자, 그리고 주전자 주위를 둘러싼 공기의 느낌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 시기 작가들의 공통적 해석에 의한 회화적 표현이다. 이 그림 전체에 산란되는 빛은 렘브란트의 회화에서 자주 보이는 그런 빛이다.


렘브란트와 동시대를 호흡했던(실제 이 그림을 그린 클라스 나이가 렘브란트 보다 9살 더 많다.) 클라스가 그의 그림에서 이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페테르 클라스(Pieter Claesz, 1597 ~ 1660)는 벨기에의 베르쳄에서 태어나 1620년 네덜란드로 이주하여 Guild of St. Luke(성 루크 길드- 당시 가장 큰 예술조합)에서 일생 동안 작품 활동을 했다. 이 시기에 네덜란드에서는 정물화가 유행을 했는데 그중에서도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을 그린 그림들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러한 정물화들은 아침식사 그림(ontbijtjes - ‘온트베찌’라고 하는데 네덜란드어로 ‘아침식사’라는 말이다.)이라고 부르는데, 클라스는 빌럼 클라스 헤다(Willem Claesz Heda)와 함께 네덜란드 회화의 새로운 양식으로 부상한 ‘아침식사 그림’을 발전시켰다.


‘온트베찌’에서 출발한 이들의 그림은 점차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에 이르는 철학적 문제로 확장되었고 그 결과 그들은 탁자 위에 음식뿐만 아니라 해골이나 앵무조개 껍질, 촛불(특히 불꽃이 꺼진 뒤 피어오르는 연기를 포착), 그리고 시계, 나침반 등 음식과는 무관하지만 삶의 문제로 유추될 수 있는 여러 물건들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림의 식탁은 풍성하다. 학세(독일식 돼지고기 뒷다리 요리)와 닮은 돼지고기 요리가 있고 빵도 있다. 호두와 비슷해 보이는 견과류도 있고, 쨈을 담을 만한 작은 용기는 숟가락이 걸쳐져 뚜껑이 반쯤 열려 있다. 그 옆의 작은 유리잔은 앞쪽의 큰 주석 잔과는 다른 방향으로 넘어져 있다. 국자는 넘어진 잔에 가려 자루만 보이고 유리잔에는 음료인지 술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반쯤 담겨 있다. 식탁보는 한쪽 귀퉁이가 말려 올라온 탓에 빵을 담은 접시가 약간은 불안하게 보인다.


이것은 화가가 나름 의미를 부여한 시간의 상징들이다. 불그레한 고기 빛이 선명한 돼지고기는 현재의 시간이다. 클라스가 즐겨 사용하는 색은 무채색 종류 즉, 회색과 짙은 갈색, 그리고 백색인데(유채색을 써도 대부분 명도가 낮다.) 이 그림에서 유채색에 가까운 것은 고기와 빵뿐이다. 그 두 개의 사물은 현재의 삶이다. 빵 밑에 불안하게 위치한 쟁반 역시 불안한 현재의 표상이다. 질병과 전쟁으로 언제 삶을 마치게 될지도 모르는 불안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런가 하면 넘어진 두 개의 컵은 과거의 삶이다. 시간의 경과를 그림을 보는 이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작가의 장치는 바로 ‘넘어짐’이다. 즉, 두 개의 컵은 오래전 다른 시점으로부터 출발하여 또 우리를 관통하는 시간의 표상인 셈이다. 어쩌면 죽음을 상징할 수도 있다. 그리고 유리컵 속의 액체와 말려 올라간 식탁보는 미래의 암시다. 반드시 비워질 잔은 희미한 희망일 수 있는데 언젠가는 비워질 음료와 누군가에 의해 바르게 손질될(평화로워질) 식탁보는 미래에 대한 작가의 의지이거나 또는 기대일 수 있다.


이 그림의 또 다른 특징은 혼란스러운 사물의 배치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매우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남아있는 중세의 절대적 기준인 균형과 조화다. 마치 비발디의 조화의 영감(L'estro armonico)을 듣는 듯하다. 말려 올라간 식탁보의 어지러움을 저그(주전자)가 보완하고 있고 학세의 다리가 위로 치켜 올라간 것을 국자의 손잡이 장식이 식탁보 밑으로 내려옴으로 화면은 상하 조화를 이룬다. 두 개의 컵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넘어짐으로 역시 균형을 이룬다. 이러한 세심한 배려가 전체 그림을 조화롭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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