緣起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일요일에 있는 방송통신고 출석수업 강의를 하고 왔더니 몹시 피곤하다.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하시는 어르신들(내 나이와 비슷한 60대들이 대부분이니 내가 어르신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약간 부적절한 면이 있다.)을 만나는 것은 나름 의미 있지만 주말이라는 인식 때문에 좀 더 피곤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피곤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면서 문득 나의 교직생활을 돌아본다.
이제 교사 신분의 유효기간이 지나온 시간과 비교해 보니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停年이란 문자 그대로 멈추는 시간이라는 것인데, 여기서 ‘멈춘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상당 부분 개입된 상황이다. 물론 법령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자의 타의의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어쨌거나 요즘은 내가 교사로 살아온 지난 시간을 자주 돌이켜본다. 교직이 첫 직장이 아니어서 다른 이들보다는 조금 늦은 87년 시작 한 이후, 나는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삶이 나아지기를 기원하며 지금에 이르렀는데 생각해 보면 부끄러운 일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세월에 덮이니 이제는 그 감각도 제법 무디어졌다. 지금 내가 담당한 아이들은 고2인데 이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의미일까 하고 스스로 자주 물어본다. 그 생각의 끝에 나와 그들, 그리고 그들과 나의 관계가 기묘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지나온 모든 날들과 그 모든 사람들과 나의 관계를 불교적으로 정리해 보자면, 거기에는 緣起법칙이 작용하고 있다. 연기라 함은 존재와 생성, 그리고 무와 소멸의 관계에 있어서 모든 존재 사태들이 상호의존적이라는 사실,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의 원칙 속에 있다. (『상윳다니까야』 제2권, 「열 가지 힘의 품」 2, 117쪽.)
내가 교직을 시작한 87년 이래의 모든 일이 있으므로 해서 현재의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해서 역시 나의 제자들과의 관계가 생겨나고 현재 유지되며 동시에 나의 교직 생활이 끝나면 현재의 아이들과의 관계는 정리될 것이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정리될 뿐, 그 모든 상황은 연기 속에 존재한다. 여기에 연기의 변증이 있다.
연기의 변증이라 함은 대체로 이런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화엄경을 요약한 의상의 화엄경 법성게에서 의상은 하나와 여럿, 그리고 여럿과 하나가 둘이 아님을, 그리고 부분과 전체 그리고 전체와 부분이 둘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정리하자면 연기의 변증이란 원인이나 결과가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으니 결과와 원인은 언제나 치환될 수 있고 동시에 원인에 의해 생성된 결과는 다시 원인으로 작용하여 거대한 인다라망(인드라망)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개체는 전체이고, 전체는 하나의 개체 속에 존재한다는 상의상관성이며, 하나의 개체를 이해함은 전체를 이해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가르친 아이들 한 명 한 명은 곧 내가 가르친 아이들 전체이며 그 전체는 다시 한 명의 아이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다. 한 명의 아이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로부터 출발한다. 오늘 방통 수업은 참으로 힘들었지만 그분들 한 명 한 명이 바로 40여 년 동안 내가 가르친 전체일 수 있고 동시에 내가 가르친 전체 아이들과 연결된 모든 인연들로 확산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