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8)
실존의 세 가지 방식
키르케고르의 세계관 또는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은 그가 주장한 세 가지 실존 방식에 나타나 있다. 사실 이 세 가지 실존 방식은 1843년 'Victor Eremita(승리하는 은둔자)'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최초의 저작 『Either/Or』(‘둘 중 하나’, 또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등으로 번역)로부터 1843년 'Johannes de silentio(침묵의 요하네스)'라는 가명으로 출판된『Fear and Trembling』(공포와 전율)의 두 책에서 주로 설명되고 있다. 물론 키르케고르의 다른 저작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러한 실존 방식이 표현되고 있다.
키르케고르는 이 세 가지 실존의 방식을 독립적인 부분으로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세의 학자들이 의도적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내용을 분류한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해해야 할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여러 책에서 분류한 실존의 세 가지 방식을 논의해 보고자 한다.
세 가지 실존 방식을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구분한다. 즉 '심미적 실존(The Aesthetic Sphere)', '윤리적 실존(The ethical Sphere)', 그리고 '종교적 실존 방식(The Religious Sphere)이다'.[1]
1. 심미적 실존 방식(The Aesthetic Sphere)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심미적 실존 방식으로는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없고, 오히려 자아로부터 소외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심미審美[2]란 그저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미를 추구하는 이들이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는, 삶의 기쁨만 추구할 뿐, 그 외 삶에서 어떤 진지함도 발견하기 어려운 존재들로 보인다.
심미적 실존 방식에도 수직적인 여러 단계가 있다. 가장 고상한 심미주의자가 맨 위에 있고 원초적인 심미주의자는 밑바닥에 속한다.
키르케고르가 가장 원초적인 심미주의자로 예를 든 인물은『Either/Or』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돈 후안’이다. 그의 바람기도 문제지만 그가 사랑을 대하는 태도가 더 문제인데 이것을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주말 내내 집에서 빈둥거리며 T.V.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고,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심심한 것을 이기지 못한 채 캔맥주와 기타 간식거리를 마시고 먹으며 권태로움을 달래는 정도의 존재들이다. 내일에 대한 계획보다는 지금 현재 이 순간의 삶에 충실한 존재들을 말하는데 이런 존재를 경멸한 키르케고르는 이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런 종족은 분명히 남자의 욕망이나 여자의 육욕의 산물이 아니다. 그들은 모든 하등동물과 마찬가지로 고도의 다산성多産性을 특징으로 하고 있어서 끊임없이 증가한다. 그런 존재들을 낳기 위해서 자연이 아홉 달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들은 차라리 스무 개 단위로 생산되어야 할 것이다.”[3]
이들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평가는 거의 혐오에 가깝다.
원초적 심미주의자 바로 위에 상인들이 있다. 상인들은 약삭빠른 거래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앞선 제일 낮은 단계의 존재들이 느끼는 지극히 원초적인 쾌락보다는 상위에 있지만 키르케고르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차이가 나 보이지 않는다. 거의 비슷하거나 아니면 같은 수준으로 이해한다. 이들을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표현한다.
“모든 우스꽝스러운 것 중에서도 내게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보이는 것은, 식사도 즉석에서 해치우고, 일도 즉석에서 해치우는 식으로 세상사를 처리하려는 성급한 사람이다. 그래서 중대한 순간에 이런 상인의 코 위에 파리가 내려앉은 것을 보거나, 그 사람보다도 더 서둘러 지나가는 마차가 그에게 물을 튕기는 것을 보거나, 도개교跳開橋가 그의 앞에서 올라가는 것을 보거나, 지붕에서 기와가 떨어져 그를 쳐서 죽게 하는 것을 보면 나는 진심으로 웃음이 터진다.”[4]
우연하게 일어나는 일에 무방비 상태이면서도 삶에 대한 이들의 태도, 즉 바쁘고 정신없는 태도를 키르케고르는 앞선 쾌락을 추구하는 그러나 권태로운 원초적 심미주의자와 다르지 않게 평가한다. 바쁘게 살면서도 우연한 기회에 죽거나 시간을 허비하거나 엉뚱한 일에 휘말리는 상인들의 모습에서 키르케고르는 쾌락을 추구하는 것과 비슷하게 그들의 실존을 파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심미적 실존의 가장 높은 단계는 귀족적 쾌락주의다. 이들은 나름 미적 의식을 가지고 미를 함양하려 노력한다. 이들의 정신세계를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들은 비록 하느님이 (그들의 죄를) 제아무리 꼬박꼬박 기장記帳을 한다고 해도, 하느님도 그것까지야 알 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빌어먹을 것들! 그래서 나의 영혼은 언제나 구약성서와 셰익스피어로 되돌아간다. 거기서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인간이라고는 느낄 수 있다.”[5]
이 귀족적 심미주의자들의 모델은 바로 키르케고르 자신이었다. 덴마크 엘리트 집단에서 태어난 자신의 삶이 바로 이와 비슷했다. 그래서 앞서 이야기한 원초적인 집단이나 상인들에 대해 호의적일 수는 없었다. 스스로 매우 고상한(셰익스피어로 대표되는) 심미 주의에 빠질 위험성을 알고 있었고 동시에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노력했다.
심미적 실존의 다른 표현은 바로 쾌락주의다. 처음 언급했던 것처럼 감각적 충족을 추구하는 실존의 방식이 바로 심미적 실존 방식이다. 각 단계의 사람들이 느끼는 감각의 강도나 감각의 종류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본질적으로 짜릿한 쾌감을 추구하는 것은 비슷하다.
심미적 실존의 쾌락 추구는 결코 인간다운 자아의 성취로 이어질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쾌락은 지극히 생물학적인 것으로서 쾌락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탄식한다.
“영혼의 옆구리에 쾌락이라는 박차를 아무리 가해도 보람이 없다. 나의 영혼은 이제 힘을 잃었고, 왕자처럼 도약을 하지도 못한다. 나는 모든 환상을 잃었다. 한없는 쾌락의 바다로 뛰어들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쾌락도 나를 지탱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나 자신이 나를 지탱하지 못한다.” [6]
쾌락의 끝은 매우 권태롭다. 키르케고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쾌락의 끝이 권태라는 것을! 그는 권태를 이렇게 설명한다.
“신들은 권태로워져서 인간을 창조하였다. 아담은 홀로 있었기 때문에 권태로워졌다. 그래서 이브가 창조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권태는 세상에 들어왔고, 인구의 증가에 정비례해서 권태도 늘어만 갔다. 아담은 혼자서 권태로워졌고, 아담과 이브는 함께 권태로워졌고, 아담과 이브와 카인과 아벨은 가족이 통째로 권태로워졌고, 다음으로는 세상의 인구가 늘어가자 사람들은 대량으로 권태로워졌다. 사람들은 기분전환을 하기 위해 하늘까지 솟아오를 탑을 세울 생각을 하였다. 이 생각 자체가 탑의 높이만큼이나 엄청나게 권태로운 것이고, 권태가 얼마나 우세 해졌는가를 말해주는 무서운 증거다.”[7]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권태로움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8] 따라서 그는 이 권태로움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그것이 바로 윤작輪作이다. 윤작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토지를 구획하여 일정한 토지를 쉬게 하고 나머지 토지를 경작하며 해마다 휴경지를 바꾸는 농사법이다. 이 방식대로 키르케고르는 심미, 즉 쾌락을 추구하면 그나마 권태로움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단 키르케고르는 윤작의 의미에 제한을 둔다. “윤작이란 땅을 바꾸는 것이라고 규정지어 두어야 할 것이다. 물론 농부는 이 말을 그런 뜻으로 사용하여, 말하자면 변화의 무제한적인 무한성과 광범위한 차원에 의존하는 윤작에 관해서 언급하려고 한다.”[9]
동시에 이렇게 제안한다. “내가 제안하는 방법은 토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진짜 윤작과 마찬가지로 작물을 바꾸고 경작법을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세상에서 유일한 구원의 원리인 제한의 원리를 갖게 된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한하면 제한할수록 보다 더 많은 창의력을 발견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키르케고르의 윤작이라는 방법을 통해 권태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자기 제한’ 그리고 '금욕주의'로 나아간다. 이 지점에서 키르케고르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명상록 한 구절을 언급하는데 핵심은 ‘다른 관점’이다.
“그대는 그대의 인생을 평가할 힘을 갖고 있으므로, 사물을 이전에 본 관점과는 다른 관점에서 보라.”[10]
[1]『키르케고르 실존극장』 도널드 파머, 정영은 옮김, 필로소픽, 2024.
[2]심미: 영어 ‘Aesthetic’은 ‘미학적인’ 또는 ‘심미안이 있는’ 정도로 번역되는데 키르케고르가 실존의 방식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심미’는 ‘감각적’이라는 말에 더 가깝다. 즉 ‘심미적’이라는 말을 ‘감각적’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해 보인다.
[3]『Either/Or』(2부)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임춘갑 역, 다산글방, 2015. 69쪽.
[4]『Either/Or』(1부)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임춘갑 역, 다산글방, 2015. 40쪽.
[5]앞의 책. 45쪽.
[6]앞의 책. 57쪽.
[7]『Either/Or』(2부)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임춘갑 역, 다산글방, 2015. 67쪽.
[8]앞의 책. 66쪽
[9]앞의 책. 71쪽
[10]본래 이 구절은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제7권 2의 내용을 키르케고르가 이 글의 내용에 맞춰 개작한 것이다. 본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신의 교리나 철학적 결의와 결론이 당신 안에서 죽어서 당신을 행복하게 살게 하는 적절한 힘과 효능을 잃는다는 두려움이 무엇이겠는가? ~ 일어난 이 일에 대해, 그것이 무엇이든, 옳고 진실한 것을 생각하는 것은 내 힘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