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32)
4) 시간성과 일상성
현존재는 시간성 앞에 언제나 열어 밝혀져 있다. ‘시간성과 일상성’이라는 주제는 그 현존재의 시간성과 일상성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즉 현존재가 시간성에 열려 밝혀져 있음이 본래적인가 혹은 비 본래적인가에 따라 시간성을 추정해 보는 것이다. 본래성은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현존재가 양심의 부름에 따라 결단하여 독자적인 자신으로 돌아간 것이라면 비 본래성은 현존재가 세계-내에서 공동 현존재들과 사이에 처해 있으며 퇴락하는 평균적이고 무차별적 존재양식이다.
현존재의 비 본래성에 시간성을 개입되면 바로 일상적 현존재의 시간적 해석이 가능해진다. 다시 정리하자면 이것은 현존재의 실존적 구조의 근본 구성과 그것의 시간적 해석의 예비적 구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즉 시간성에 근거하여 현존재의 존재 구조가 가능한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1]
(1) 열어 밝혀져 있음의 시간성
이 열어 밝혀져 있음은 존재자가 실존하면서 자신의 ‘거기(Da)’[2]에 자신이 존재할 수 있도록 그렇게 존재자를 구성하고 있음이다. 여기서 그의 존재, 즉 염려[3]의 시간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염려의 구조계기들, 이를테면 ‘이해’, ‘처해있음’, ‘빠져있음’(퇴락), ‘말’ 등의 시간성을 해석해야 한다. 물론 이 구조계기들의 시간성은 다시 하나의 시간성으로 통일된다.
⒜ 이해의 시간성
현존재는 이해함을 근거로 하여 ‘둘러봄’, ‘그저 바라봄’ 등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실존하면서 구성할 수 있도록 한다. 당연히 ‘거기에(Da)’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해를 근원론적으로 그리고 실존론적으로 파악한다면 현존재는 제각각, 그때마다, 그 때문에 실존하고 있는 존재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음을 구성하면서(기투하면서) 존재하는 것이다.[4]
그래서 현존재가 이해하면서 각각, 그때마다, 그 자신에게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가능성의 문제일 뿐, 발견하는 것도 아니고 더불어 과정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이해를 통해 실존 상황이 달리지는 것은 아니다. 실존은 언제나 의심의 연속이다. 그래서 언제나 열어 밝혀져 있어야 한다.
여기서 도래의 시간성이 개입하게 된다. “현존재가 자기를 이해하는 바탕에는 그때그때의 가능성에 입각해서 ‘자기를 향해 도래하는 것’으로서 장래가 놓여있다. 현존재는 언제나 그때그때의 가능성으로서 실존한다. 장래는 자신의 존재 가능 안에서 이해하면서 실존하는 그런 존재자들을 존재론적으로 가능하게 한다.”[5]
이 말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현존재의 이해는 자신의 실존 상황을 수용하고 그 수용을 바탕으로 장래(앞으로)를 향한 어떤 토대가 되는 동시에, 그 자체로 현존재의 실존에 중요한 시간성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해의 시간성은 장래를 향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현존재는 장래에 대해 이해가 있으므로 해서 죽음으로의 선구가 가능하고 동시에 염려의 구조에서 본다면 언제나 자기를 앞질러 있게 된다. 그래서 이해의 시간성은 언제나 장래이다.
그러면 ‘이미 ~내에 있는’, 즉 기존성(=과거)의 시간과 몰입해 있는 현재의 시간이 남는다. 하이데거는 현재의 시간을 순간(Augenblick)이라 불렀는데 “본래적 시간성에 머무르는, 따라서 본래적인 현재를 우리는 순간이라고 부른다.”[6]라고 설명한다. 본래적이라 함은 근본적이며 양심의 부름에 따라 결단한 상황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순간은 찰나와는 다르다. 순간에 대응하는 비본래적 현재적 시간성을 하이데거는 현재화(Gegenwärtigen)라고 불렀다.
마지막으로 ‘이미 ~내에 있는’, 즉 기존성(=과거)의 시간은 피투성에 근거하여 독자적으로 자기에게 도래함이다. 즉 자기가 이미 있었던 상황으로 되돌아 옴이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반복(Wiederholung)[7]이라 불렀다. 여기에 대응하는 개념은 망각(Vergessenheit)인데 망각이란 존재했던 방식에 따라 존재하는(더하거나 빠짐이 없는) 시간적 상황을 의미한다.[8]
이해의 시간성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회복하는-순간적-장래’와 이에 대응하는 ‘망각하며-현재화되는-기대’이다.[9] 각각 미래 현재, 그리고 과거의 시간성이 본래적 혹은 비본래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며 동시에 각각에 대응하게 된다.
⒝ ‘처해 있음’의 시간성
‘처해 있음’에는 언제나 두려움과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두려움은 존재 내부에 그리고 세계 내부에 언제나 있다. 두려움은 주변(환경 세계로 표현되는) 어디에도 있다. 이와는 달리 불안은 제한적이다. 즉 죽음을 향해 던져진 세계 안의 존재자로서의 현존재 자체로부터 기원한다.
‘처해 있음’은 근본적으로 피투성(즉 던져져 있음)에 근거한다. 그것으로 추론되는 것은 ‘처해 있음’이 일차적으로는 기존의 상황들이 일정한 시간의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 두려움과 불안이 일차적으로는 기존성[10]에 근거한다 하더라도 염려 전체를 통해 두려움과 불안은 각각 독립적으로 시간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그 근원을 달리한다
.
두려움의 본질은 비 본래적인 ‘처해 있음’이다. 즉 퇴락하는 일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것이다. 단적으로 두려움은 어떤 위협적인 것에 직면하였을 때 실제로 현존재의 존재 가능에 해로움을 줄 수 있다고 여겨질 때 생기는 감정이다. 위협적인 것을 알게 하는 것은 현존재의 일상적인 둘러 봄이다. 이를테면 두려움은 비 본래적 시간성에 근거한다. 일상 세계에 몰입된 현존재에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불안은 근본적으로 처해 있음으로부터 나온다. 현존재는 불안을 통해 자신의 피투성에 다가갈 수 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현존재는 세계 안에 있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다시 한번 자신의 실존이 새로워지게 된다. 불안의 대상은 세계의 없음이다. 불안의 대상도 이유도 모두 현존재 자신으로부터 비롯된다. 당연히 불안은 장래를 향할 수밖에 없다.
⒞ 퇴락의 시간성
하이데거는 퇴락 현상으로 빈말(잡담), 호기심, 애매성을 거론했지만 퇴락의 시간성을 설명하면서 호기심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그 까닭은 호기심에는 퇴락의 특수한 시간성이 가장 쉽고 분명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11]
호기심이란 말 그대로 무엇을 보기 위해 또는 찾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 헤매는 태도다. 찾아서 보려고 하는 것은 현재일 수밖에 없다. 호기심을 비롯하여 퇴락의 현상인 빈말(잡담)이나 애매성 등의 실존론적 의미는 현재에 있다. 현재이어야만 존재자(전재자, 가용적 존재자)와 만나게 되고 존재자는 그로 인해 현재라는 상황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호기심의 특징은 언제나 아직 보지 못한 것을 준비(찾고)하고 이미 본 것은 잊어버린다.(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기 때문에) 항상 그다음으로 향하는(예비하는) 호기심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 말의 시간성
‘현(Da)’이 세계를 향해 열어 밝혀지는 계기는 말에 의해 나누어진다.[12] 따라서 말 자체는 어느 특별한 형태의 시간성(현재, 미래, 과거)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13]따라서 하이데거는 말의 특정한 시간성에 대해서는 언급을 줄이고, 다만 세계에 대하여 열어 밝혀지는 성질의 일반적 시간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이해는 일차적으로 장래(기대함, 앞질러 가봄)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이해(장래적인)는 그때마다 기존의 현재이다.
② 처해 있음은 일차적으로 회복이나 망각으로 시간성을 가지게 된다. 그럼에도 기존의 처해 있음은 현재화된 장래로서 시간성을 가진다.
③ 퇴락은 시간상으로는 일차적으로 현재에 뿌리박고 있다. 그럼에도 퇴락적 현재는 기존적 장래로부터 멀어지듯이 나타나거나, 또는 그것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시간화를 겪는다고 해서 과거 현재 미래가 순서대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설사 장래라고 하더라도 기존성보다 더 이후가 아니며, 역시 기존성이 현재보다 더 이전도 아니다. 시간성이란 기존의 – 현재화된 - 장래로 나타난다.[14]이를테면 지극히 병렬적 작용이라는 것이다.
[1] SZ 11판, 1967. 334쪽.
[2] ‘거기’는 현존재의 ‘현’을 의미함. 공간과 시간을 모두 포함하는 존재자의 위치를 의미함. 이를테면 ‘나는 지금 학생으로 학교에 위치하고 있다’에서 ‘지금’, ‘학생으로’ 그리고 ‘학교’의 시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 거기(Da)라고 볼 수 있음.
[3]앞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염려를 현존재 시간성의 근거로 삼았다
.
[4] 같은 책 336쪽
.
[5]『존재와 시간 강의』 소광희 지음, 문예출판사, 2003. 210쪽
[6] SZ 11판, 1967. 338쪽.
[7]이기상은 반복이라고 번역했고 소광희는 복귀라고 번역한다. 본래 의미는 반복에 가깝다.
[8] 같은 책, 339쪽
[9]본래적인가 혹은 비본래적인가는
[10]현존재가 처해 있는 세계, 즉 가용적 존재자들과 전재자들 사이, 거기(Da)에 있어온 지나간 시간성과 공간성 전체를 말함.
[11]『존재와 시간 강의』 소광희 지음, 문예출판사, 2003. 215쪽
[12]이를테면 현존재의 발화를 통해 그것이 현존재 자신인지 가용적 존재자인지 전재자인지 아니면 환경세계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13]독일어 ‘Rede’는 ‘conversation’, ‘talk’, ‘speech’, ‘address’의 뜻이기 때문에 특정 시제의 문제나 말의 대상에 대한 표현의 방향은 큰 의미가 없다.
[14] SZ 11판, 1967. 3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