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지내고 온 아이들은 거의 무력증에 빠진 듯 보인다. 나른하고 의미 없어하는 표정이 너무나 역력하다. 이 아이들에게 오늘은 저번 시간에 이어 2.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를 이야기해야 한다. 약간은 난감하고 또 약간은 당황스럽다.
특히 이번 시간에는 스피노자를 방편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의 삶과 그의 생각을 넌지시 전해 주어야 하는데 이 아이들에게 적합한 수준의 이야기를 나는 ‘에티카’ 속에서 며칠 전부터 찾아 헤맸으나 별로 건진 것이 없다. 잘 알고 있듯이 ‘에티카’는 만만한 책이 아니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이야기하기는 의외로 쉽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는 조금 다른 문제이면서 매우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은 명사형으로 대부분 대답이 가능하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사실 간단하지가 않다. 어쩌면 매 순간, 또는 매 일 바뀔 가능성이 있는 것이어서 간단하게 명사형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임에 틀림없다.(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는 깊이 할 수가 없다. 이 문제는 여러 철학자들이 제기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유대교 공동체를 벗어나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며 독자적인 삶의 행보를 보인 것은 그가 단순하게 ‘무엇을 위해 삶을 살 것인가?’ 보다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즉 일상의 삶의 모습이 어떠한가? 에 더 집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매 순간 삶의 과정에 목적을 두는 것과 어떻게든 거기로 가면 된다는 단순한 목적 지향적인 삶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강조한다. 특별한 방편을 이용하여 아이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특별한 방편은 오히려 아이들의 생각을 제한할 위험도 있어 그냥 두기로 한다.
무엇을 위해?라는 부분에서 '욕망’이라는 부분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스피노자의 삶이 이 위에 겹쳐진다. 욕망을 위한 삶인지 혹은 욕망을 조절하는 삶인지를 ‘자유인’ 혹은 ‘예속인’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방편을 쓴다.
예 1. 아침에 일어나고 싶지 않은데(욕망) 일어나야 한다.(욕망의 조절) (학교, 공부, 기타 등등)
예 2. 욕망이란? 무질서에 가까워지는 상태. 지극히 개인적인 상황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많아지는 상태라고 가정했다.(이것에 대한 논의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이기는 하다.)
예 3. 이러한 욕망을 조절하며 살아가는 것과 욕망하는 대로 사는 것을 자유인과 예속인으로 구분한다.
예 4. 자유인으로 살다가 간 스피노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매우 한정적이기는 하지만 아이들이 희미하게 이해하는 눈빛이다. 지금 자신의 삶에서 자유인으로 사는 부분과 예속인으로 사는 부분을 다음 시간에 쓰기로 하고 수업을 마쳤다.
사실 지금 하는 내용이 전체 과정에서 어쩌면 가장 난해한 과정일 것이다. 왜냐하면 14~6세의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60이 다 되어 가는 나도 어려운 일을 아이들이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이들의 혼란을 이해하여야 한다. 역시 믿음이 필요한 일이다.
바탕그림은 Ivan Shishkin, A Rye Field, 18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