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학교와 나 05화

오늘, 장면 둘.

by 김준식


# 오늘 1


오늘은 우리 학교 전 직원 등교일이다. 2021학년도 신 학년 업무분장을 완성했다. 워낙 작은 학교라 오전 중에 선생님들이 뜻을 모았다. 점심은 배달 음식으로 해결했다. 코로나 시대의 학교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여러 종류의 중국음식들을 공유하였다.


업무분장을 민주적으로 하기 위해 여러 학교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것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만 한다. 그것을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혼선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혼선을 미리 막기 위해 권위적으로 업무를 분장하던 시절도 있었고, 지금도 그 방법이 그대로 적용되는 학교도 있다. 그런가하면 민주적인 방법으로 업무분장을 하기 위해 애쓰는 학교도 있다.


학교의 규모와 상관없이 내부 구성원들의 의사를 어떻게 끌어내는가에 대한 문제는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우리 학교는 이렇게 조정했다. 지난해 12월 말쯤 2020년 업무 톺아보기 시간을 가졌다. 자신의 올해 업무를 면밀히 돌아보고 정리하여 구성원들과 공유하는 기회를 가졌다. 여기서 나온 것이 2021년 업무분장의 기초자료가 되었다. 1월 초에는 2021년 자신의 특수한 상황(개인적인 일부터 학교 내부적 일까지)을 서로 공유하고 지난해 업무에서 역할과 2021학년도 역할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였다. 이 자료를 이용하여 이미 초안이 마련된 업무분장의 내용을 조정하였다. 그리고 오늘 다시 모두 모여 업무분장을 완성하였다.


우리 학교가 이런 과정으로 업무분장과 신 학기 맞이가 가능한 것은 일반적인 학교 현장에 반드시 존재하는 심각한 갈등 요소가 우리에게는 없거나 희미하기 때문이다. 바로 승진을 위한 점수를 나누는 부분에 있어 우리 학교는 대단히 자유롭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면 지금과 같은 분위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어쩌면 권위적으로 강제 분담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다툼이 생겨날 수도 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민주적이고 혁신적으로 업무분장을 하기 위해) 길게는 일주일, 또는 2~3일을 서로 마주 보며 조정했을 수도 있다.


결국 업무 분장이라는 단어는 몇 개의 중의적 의미를 가진다. 外示적인 말 그대로 학교의 업무를 나누어 맡는 것과 共示적 의미로는 학교에 따라 민주적이거나 또는 혁신적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권위적인 학교 업무의 분장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가면 학교 업무 분장은 학교 민주주의의 바로미터로도 읽힐 수 있고 또는 단위 학교 현장의 구성원 상호관계의 상황으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롤랑 바르트가 제시한 기준에 따라 분류해 봄)


#오늘 2


사는 것이 문득 無聊해지고 무의미해지면 홀연히 나의 근원을 생각해 본다. 내 삶의 근원이래야 작은 옹달샘처럼 정말 미미한 출발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이곳저곳의 물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것이다. 여기서 ‘물’이란 존재는 나의 영혼과 육체를 망라하는 말이자 동시에 그 내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그 反映들이다.


물은 흐름이다. 흐르는 것은 멈추지 않아야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다. 멈추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잘 다져진 토대와 그 토대의 유지를 위한 시간성이다. 뿐만 아니라 흐름은 유동성을 담보로 한다. 즉, 어떤 것으로부터도 간섭받지 않으려는 물의 본성과 동시에 그 어떤 것도 품어 낼 수 있는 양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더불어 어떤 모양과 틀에도 반드시 들어찰 수 있지만 스스로 그 어떤 형태로 귀결되지 않아야만 한다. 따라서 물은 和而不同 그 자체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유동성이 완벽해질수록 그 속성에 따르는 또 다른 문제가 새롭게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停滯다. 정체란 유동성의 또 다른 면이다. 유동하여 움직이는 특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바로 정체, 즉 고임이다. 출구가 없는 웅덩이에 갇힌 물은 반드시 썩게 되어 있다. 물이 내 정신의 흐름을 표상하는 것이라면 그 물이 고여 썩어간다는 것은 곧 내 의식과 사상이 고여 썩어 감이다. 출구가 없는 웅덩이에 고여 있다면 거의 불가피해 보인다. 주역에는 坎止라는 말이 있다. 고인 물이 흐르는 길은 때를 기다려 다시 물이 차면 흐른다는 뜻인데 정체의 끝을 다시 흐름으로 연결 지은 주역의 생각이 놀랍기만 하다.


그러나 물리적이고 실체적인 물은 그러한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정체와 부패에 이르겠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나의 모든 것의 반영을 비유한 대상으로서의 관념의 물이라면 이 정체와 부패가 불가피하지만은 않다. 2600년 전 인도의 부처는 이 상황을 경험하고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내어 그의 제자에게 설명하였다. 그 설명, 즉 마음의 정체와 부패를 극복하고 언제나 쉬지 않고 흐르는 물의 본성을 회복하는 방법을 설명해 놓은 경전이 우리가 잘 아는 대방광불화엄경이다. 줄여서 화엄경이라 부르는 이 경전은 부처의 깨달음에 대한 논리적이며 체계적인 설명으로 되어있는데 그 핵심은 緣起와 圓融으로 표현될 수 있다.


마음의 정체는 그 원인이 바로 마음에 있다. 내 마음의 주인은 나 자신이다. 마음의 정체를 일으키는 원인을 스스로 제공하여 자신을 정체에 빠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정체로부터 벗어나는 길 역시 나의 내부에 방법이 있을 것이다. 부처는 내부의 그 원인을 찾아내서 없애야 된다는 이야기 했다. 자명한 이야기여서 언뜻 쉬워 보이지만 그리 쉽지만은 않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의외로 그 ‘누구나’의 범위는 한 없이 좁다. 따라서 그 원인에 대한 접근방식과 논리는 여전히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궁극의 세계일 수 있다. 꼭 부처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자구 노력을 해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살아온 내내 이런 노력을 줄곧 기울여 왔고 가끔 봉착했던 수많은 정체에서 잘도 탈출했던 경험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마음의 정체와 그 부패는 바로 이 순간 영원처럼 깊이 올 수도 있기 때문에 언제나 마음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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