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보다 이어폰을 잃어버리는 게 더 슬픈 일일 것이다.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선 또 다른 목소리가 필요했다. 평소 나의 통제권을 벗어나는 목소리들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그는 대뜸 한 연예인이 130억 주고 산 아파트는 어떻게 생긴건지 궁금해하고. 좋아하는 브랜드의 신상품이 없는지 물어온다. 나는 그러한 요구를 무시하다가도, 이내 순응한다. 검색창에 한 연예인 이름을 검색하고, 쇼핑몰에 들어가 신상품이 올라온 게 없는지 확인한다. 이런 목소리들은 조금 세속적이고 통속적일 뿐 나의 안위를 크게 위협하지는 못한다.
나의 안위를 크게 위협하는 목소리가 문제이다. 그것들은 나의 수치심, 불안, 그리고 죄책감을 불러 일으킨다. 왜 나는 이토록 게으를까. 왜 나는 다른 사람처럼 좋은 글을 쓰지 못하는 걸까. 나는 왜 그때 다정하지 못했을까. 왜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이룬 게 없는 것일까. 이런 질문은 뜬금없이 마음 속에 피어올라, 어느새 나를 잠식한다. 어찌할 수 없는 질문들에 나는 이리 끌려다니고 저리 끌려다니며 우울해진다. 마지막엔 그런 생각을 통제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한다. 사주 선생님은 이런 나를 보며 나무인데 "물에 절여있다"고 표현했다.
이제는 안다. 이런 목소리를 통제하지 못할바엔 억압이라도 해야한다는 것을. 그것도 강경하게. 가장 효과적인 억압수단은 음악이었다. 버스를 탔을 때.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음악을 들으면 신기하게도 내 마음 속에 존재하던, 자기혐오성 목소리들이 바깥으로 밀려났다. 그 순간만은 나는 오롯이 나의 진짜 목소리에 집중을 할 수 있고. 말 그대로 내 존재를 느낄 수 있게 된다. 그 이후론 음악에, 음악의 가사에 취해 산다. 혼자 걸어다니며 노래를 부르거나, 좋은 가사는 몇 번이고 되뇌인다. 이제는, 지갑보다 이어폰을 잃어버리는 게 더 슬픈 일일 것이다.
이러한 자기이해는 소위 감성충이라 불리는 사람을 다시 보게했다. 어딘가에 취해 사는 사람들. 나처럼 음악에 취해사는 사람이든. 시에 취해 사는 사람이든. 영화에 취해사는 사람이든. 감성적인 공간(카페, 식당 등)에 취해 사는 사는 사람이든. 몇몇 사람들은 현실감각을 잃은 채 감성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감성충이라 비하한다. 어느날 그들을 보고 “꼴깝이다”고 말하는 친구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기억이 있다. 결국 같은 부류인 나조차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닐까.
이제는 다르게 보인다. 나는 살면서 단 한번도 아무 생각도 안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내 친구는 신기하게도 자기는 항상 아무 생각도 안 난다고 했다. 물론 내 친구처럼 아무생각도 안 나, 굳이 어딘가에 취할 필요 없는 사람도 존재하지만. 이 세상엔 무언가에 취해야만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사람도 존재하는 법이다. 감성충들이 감성에 취하는 건, 어떻게든 고된 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그들 나름의 발버둥이 아니었을까? 현실감각을 잃는 행위라기보다는, 현실로 다시 돌아오기 위한 의식에 가까워 보인다. 하루하루를 살아나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충’이라는 단어를 붙여가며 손쉽게 비하하는 사회는 분명 가혹한 곳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