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준다는 것, 그 따뜻함에 대하여'
내가 태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오랜 세월동안 고민하곤 했는데 '나는 어떨 때 행복을 느끼는가'의 또 다른 질문이기도 한 것 같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줄 수 있을 때 행복하단 걸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깨달았다.
신간을 좀처럼 읽지 않는 나로써는 (그것도 소설 신간) 독특한 만남이다.
자주 가던 단골책방의 책상에 놓여있던 책을 우연히 집어들게 되었고, 그 우연한 인연이
결국에는 내 인생의 일부분이 되어버리는 신기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때로는 적절한 시기가 되기 전까지는 책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 법이죠.” 라는 어밀리아의 말처럼,
이렇게 책과의 만남 역시 예상치 않은 곳에서 일어나곤 한다.
이 책은 사랑을 잊고 있었던, 하지만 사랑하고 싶었던 ‘엘리스'섬의 책방 주인 이야기이다.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좀처럼 적극적이지 않던 사람이, 사람 냄새 풀풀 풍기는 모습으로 변모해가는 모습이 가슴이 시린듯 하면서도 따뜻해진다.
가장 먼저 공유하고 싶었던 글토막은 누군가가 서점에 놓고 간 아이를 우연히 입양하게 되면서 느낀 에이제이의 독백 같은 대사. 정말 싫어하던 만화 캐릭터 마져도 아이로 인해 좋아하게 됐다는 장면에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1
에이제이는 분홍색 파티용 드레스를 입은 마야를 보고 어딘지 익숙하면서도
뭔가 참을 수 없는 기운이 속에서 간지럽게 부글거리는 느낌이었다.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거나 벽이라도 쾅 치고 싶었다.
술에 취한 기분, 아니면 적어도 탄산이 들어간 기분이었다.
미치겠군. 처음엔 이런 게 행복인가 보다 했다가, 이내 이건 사랑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빌어먹을 사랑, 그는 생각했다.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감정인가.
그것은 죽도록 술 마시고 장사를 말아먹겠다는 그의 계획을 정면으로 가로막았다.
짜증나는 것은, 사람이 뭔가 하나에 신경쓰기 시작하면 결국 전부 다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는 점이다.
아니다. 제일 짜증나는 것은, 심지어 엘모까지 좋아졌다는 점이다.
간이 테이블 위에는 코코넛 쉬림프가 올려진 엘모 캐릭터 종이접시가 놓여 있고,
에이제이는 그것을 조달하기 위해 신나게 이 상점 저 상점 쏘다녔던 것이다.
이렇듯 소설 속의 주인공과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순간들이 종종 찾아온다. 평소에는 내면의 부드러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차갑고 냉정한 모습만이 외부로 표출되었다는 점에서 가슴이 아프기도.
#2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은밀한 두려움이 우리를 고립시킨다.
하지만 고립이야말로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유일한 이유다.
언젠가, 언제일지 모르는 어느 날, 그가 혹은 그녀가 거기에 있으리라.
당신은 사랑받을 것이다. 생애 처음으로, 결코 혼자가 아니기에. 혼자가 아니기를 선택했기에.'
주인공 에이제이와 출판사 직원인 어밀리아의 결혼식에서 한 작가가 읊은 대사. 사랑받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대한 짧은 이야기.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은 살아갈 힘을 준다. 혼자여도 괜찮지만 둘이면 더 행복하니까.
#3
어째서 이 책은 저 책과 다른 걸까? 책이 저마다 다른 건, 에이제이는 결론을 내린다.
그냥 다르기 때문이야. 우리는 많은 책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는 믿어야 한다.
때로 실망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이따금 환호할 수도 있다.
책이라는 공통 매개로 다른 삶을 살아왔던 우리들이 만난다. 책모임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의 인연을 맺어가는 일상이 감사하게 느껴지는 구절이다. 다른 건 이유가 없다. 다른 것이 본래 당연하기에, 실망할 필요도 없고 기대할 필요도 없다. 다른 채로 그냥 두는 것도 괜찮다. 그리고 그 다름을 아름답다고 인정할 수 있을 때가 오겠지.
#4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직업상 사람들을 많이 만나잖아. 근데 세상에 책 쪽 사람들만 한 사람들이 없더라고. 신사 숙녀들의 업종이지."
“잘 모르겠어. 이즈메이. 있잖아. 서점은 올바른 종류의 사람들을 끌어당겨. 에이제이나 어밀리아 같은 좋은 사람들. 그리고 난, 책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책 얘기를 하는 게 좋아. 종이도 좋아해. 종이의 감촉. 뒷주머니에 든 책의 느낌도 좋고. 새 책에서 나는 냄새도 좋아해. "
책 쪽 사람들이 좋다고 램비에이스의 입을 빌려 작가가 말하는 걸까. 괜히 작가에게 칭찬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지는 말.
이 책을 읽어내려가는 우리들을, 그리고 서점을 찾는 우리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느낌이다.
참 고맙게도 소설의 말미에는 없어질 뻔한 앨리스 섬의 책방이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남는 스토리로 끝이 난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 서로 알아가고,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
사랑을 주고 받는 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책을 사랑하는 구성원들이 한 가족을 이뤄가는 과정, 한 사람의 인생이 책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가는 모습을 보노라니 기분이 좋다.
그렇다, 나도 책과 사랑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 수 있는 것이 사랑이든, 선물이든, 사소한 챙김이든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심지어 책과 사랑을 선물할 수 있다니.
나라는 사람, 부족함 많은 사람이지만 무언가 줄 수 있는 게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오늘이다.
이쯤되면 이 소설 안의 서점이 실제로 존재하는 책방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까지 든다.
곧바로 갈 수 있진 않겠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언젠가는 찾아가고 싶다는 환상을 품을 수 있을 테니.
내 인생책 리스트에 올라갈 이 책, 책 읽는 당신이라면 만남을 권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