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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aris Feb 09. 2016

1950년대, 당신들의 천국을 찾아서

토드 헤인즈의 [캐롤]과 [파 프롬 헤븐]사이

토드 헤인즈의 [캐롤]을 보면서, 나는 자꾸 그의 2002년작 [파 프롬 헤븐]을 떠올렸다. 1950년대 뉴욕의 레즈비언 로맨스를 보며 역시 동시대의 코네티컷 교외 지역을 무대로 한 인종 간 로맨스가 떠오르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들을 함께 생각한 것은 그 공통점보다는 차이점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두려움 없이 완성된 사랑과 결국 시작도 해 보지 못한 사랑 사이의 그 넓은 간극 때문이었던 것이다. [파 프롬 헤븐]에서 묘사되는 고전적인 멜로드라마 스타일의 애조를 띤 '금지된 사랑' 이야기와는 달리, [캐롤]에는 시종일관 동성결혼이 법제화된 2015년 이후 시대의 어떤 상쾌한 감격스러움이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태생의 게이 영화감독으로서 꾸준히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영화를 찍어 온 토드 헤인즈에게, 2002년에 바라본 50년대와 2015년에 바라본 50년대는 분명 다른 이야기의 무대로 보이지 않았을까. 현재는 과거로부터 도출된 것이지만, 과거를 바라보는 필터를 화자에게 부여하는 것도 결국 지금 이 시점의 조건들이 아닌가.


[캐롤]의 갈등 구조는 아내를 소유하는 일이 곧 사랑이라고 믿는 남편, '특이한 부류'의 사람들이 아닌 평범한 이들은 동성애를 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진 남자친구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 낡은 50년대의 세계 자체가 장착하고 있는 제도와 편견으로부터 만들어지지만, 그런 세상이 그들의 사랑 자체를 진정으로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의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사실, 이 영화는 주인공들이 다른 누구도 진지하게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대한 재확인만을 무기로 삼아 자신의 망설임만을 돌파해나가는 로맨스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지점이야말로 [캐롤]의 비상한 미덕이며 뻔한 로맨스로서의 속성이다. 아니, 뻔한 로맨스이기 때문에 [캐롤]은 비상해진다. 캐롤과 테레즈는 여성이 여성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나 여성에 대한 자신의 사랑 자체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대로 좋은 어머니 노릇을 하기 위해, 직업적인 성취를 이루기 위해 각자 노력하고 있으며, 누군가의 사랑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하지도 않다. 어쨌든 [캐롤]은 카메라와 사진을 사랑한 끝에 커리어를 쌓으려고 뉴요커 지에 취직하는 독립적인 여성이 등장하는 영화인 것이다. 테레즈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확인한 순간 다른 모든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다. 영화는 단순하고 명쾌하며 건전하다. 그들은 서로를 선택하고, 사랑을 입으로 말하고, 몸으로 그것에 날인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우리는 불순물이라곤 없는 그 명징한 사랑만을 본다.

[파 프롬 헤븐]

[파 프롬 헤븐]이 묘사하는 세계는 [캐롤]이 무시하고 전진의 무대로 삼은 그 세계에 비하면 지나치게 억압적이다. 아름다운 주부 캐시와 클로짓 게이인 남편 프랭크는 완벽한 중산층 부부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 프랭크는 게이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남성들과 바람을 피고 결국에는 젊은 남자와 사랑의 도피를 하기까지 하지만, 캐시는 그녀 가까이에 있는 훌륭한 흑인 남성인 레이먼드와 손도 한 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하며, 그들의 플라토닉한 사랑을 가장 친한 이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한다. 1950년대 미국의 흑인은 여전히 백인과 분리된 구역에서 살고 있었으니, 프랭크가 지닌 남성 특권으로서의 자유로움을 제외하더라도 인종 간 결합과 동성 간 결합 중 더 금기시되어 있는 것은 아마 전자였을 것이다. 동성애는 '이상한 짓을 하는 동류들'의 취미였겠지만 흑인과 백인의 결합은 '인간과 인간에 못 미치는 것의 결합' 정도가 아니었을까. 스텝포드 와이프처럼 당대의 이상적인 스테레오타입에 가까운 완벽한 주부의 삶을 살면서도 굉장히 진보적이고 온정이 넘치는 인물인 캐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라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 인물이다. 레이먼드와 캐시는 모두 시대가 설정한 한계를 돌파할 자질과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어쩌면 [캐롤]의 그녀들처럼 더 용감한 행동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녀를 향한 실제적인 위협 앞에 그들은 서로에 대한 욕망을 포기한다. 레이먼드에게 닥친 것은 자녀 양육권의 문제가 아닌 자녀 생존의 문제였으므로, 그에게는 애초에 캐롤과 같은 같은 불운한 선택지조차도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좌절된 마음만이 남는다. 우리 모두가 알고 그들도 아는 마음은 말해지지 않는다. 캐시의 내레이션에서처럼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랑을 하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연약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연약한 탓일까. 그 세계에 갇힌 그들은 무엇이 더 연약한지 알 수 없다.


[파 프롬 헤븐]의 엔딩에서 캐시는 레이먼드가 떠나는 것을 보기 위해 기차역으로 달려간다. 플랫폼에서 그들의 눈길이 만나지만, 그 만남은 이내 열차의 벽과 움직임에 의해 차단된다. 캐시는 열차가 떠나가는 것을 하염없이 홀로 바라본다. 아직 '천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이들은 이승에서 이별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를 고르지 못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서로에게 감히 다가가지 못하는 두 사람은 한 번 교차하는 두 개의 직선처럼 점차 서로의 궤도에서 멀어질 뿐이다. 반대로 [캐롤]의 마지막 장면에서 테레즈는 밤의 도시를 용감히 헤치며 점차 캐롤에게 다가가고 있다.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는 익명의 군중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그들의 시선은 마침내 만나고, 캐롤은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거기에는 행복한 결합의 예감이 있다. 테레즈의 그 끊임없는 좇음과 응시에서, 그 응시를 발견하고 응답하는 캐롤의 미소에서, 우리는 천국에 있는 이들의 단단한 확신을 본다. 그리고 그들이 50년대에 찾아낸 천국은,  2016년에조차 곧잘 지옥으로 비유되곤 하는 나라를 살아가는 관객에게는 역시 매우 감동적이며 크나큰 위로가 되는 광경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이기는 이야기가, 사랑이 이기는 당연한 세계가 아직 더 많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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