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넷과 스물넷
서른넷
서른넷의 사랑은 평화를 향해 간다.
연애는 절대 제 1순위가 될 수 없다. 일에 방해되는 연애는 피하고 내 개인의 평화를 해치는 감정 소모를 지양한다. 일에 성공을 이룬 30대 후반이 될수록 더 심해져만가고 사람에게 쏟는 정성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사회적 성공을 이룬 사람일수록.
이러다 말면 그만이지 뭐.
연락을 하다가도 끊어지면 그만이고, 정성 들여 먼저 하려는 노력조차 시들해진다. 열심히 누군가를 찾으려는 노력은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다 흐지부지되도 이런 사람이 또 나타나겠지 싶어 크게 아쉽지 않다.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몇 번의 사랑을 거치면서 그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사실을, 그런 사람은 언제든 또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그러나 슬프게도, 여전히 나는 20대에 받았던 열열한 구애를 그리워하고 있다. 나의 오래된 기억과 기준으로는 남자의 열정은 나를 향한 그의 마음의 크기이며 그 마음들은 내 자존감이 되었다.
따라서 남자들이 보이는 시큰둥한 반응과 먼저 보내오지 않는 선톡이 그들의 마음이라 단정해버린다.
지금의 나는, 떠나려는 누군가를 잡기엔 과거의 남자들이 보여준 열정에 여전히 도취되어있고 어쩌다 겨우 쥐어짠 한 번의 용기가 묵살당했을 때는 훨씬 더 견딜 수 없게 수치스럽게 느껴진다.
나는 스물넷의 사랑을 받지도, 서른넷의 사랑을 쟁취하지도 못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아마도 나는 과도기에 멈춰 서있는 모양이다.
스물넷
남자들의 모든 태도의 변화는 내가 만나는 그들도 변했기 때문이라는 인지를 하기 전에는 이 모든 냉랭함이 단지 내 나이 때문이라 여겨왔다. 스물넷의 나보다는 서른넷의 내가 남자들에 훨씬 관대했고 훨씬 이해심 많으며 훨씬 쿨하니까. 나는 이제 사랑받을 수 없는 나이라고 여기며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나이라는 거대한 자연의 흐름은 내 자존감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를 만났다. 그는 나보다 8살이 어렸으며 20대 초반에 가까운 나이였다. 그를 만나 대화를 하고 맛있는 것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바다도 보러 다녀왔다. 그와 통하는 부분이 많았지만 나는 한혜진이 아니었고 그는 기성용이 아니었다.
글쎄. 그와 내가 최소한 같은 30대에 있었다면 어땠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에게는 30대의 안정이 더 중요했고 그에게는 20대의 즐거움이 더 중요할 게 뻔했다.
속이 상했다. 내 나이도 그의 나이도.
미웠다. 내 나이도 그의 나이도.
그러나 그는 내가 잊고 있던, 그러나 끊임없이 그리워하던 20대 남자 고유의 패기로 내가 불가능하다 여기던 것들을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30대 여자의 잃어버린 자존심이 회복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잠시 그에게 마음을 열어도 될까, 우리도 한혜진과 기성용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