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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ther kim Aug 25. 2020

"건축은 예술이 아니다, 현실 그 자체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 마쓰시에 마사시

 올해처럼 짧은 여행은커녕, 동네 몰에도 못 가게 되어버린 시간에는 지난 핸드폰 사진첩을 끊임없이 열어본다. 코로나의 파괴력을 처참하게 겪었던 작년 가을의 밀라노는 사진 속에서 거짓말처럼 화려하고 아름답다.

  

 지난가을, 스위스 여행을 마치고 이태리 밀라노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하얀 대리석의 고귀한 두오모 성당과 그 앞의 광장을 에워싼 화려한 성벽과도 같은 갤러리아의 엄청난 기세. 그곳의 뿌리를 내리고 자라온 명품 브랜드들과 레스토랑들. 그 무엇 하나 쉽게 쌓아 올린 것이 없어 보이는 도시는 그 과거를 한없이 과시하고 있었고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통해 계속해서 명을 이어갔다.

 특이하게도 나의 마음을 크게 사로잡았던 공간은 우리가 묵었던 작은 숙소였다. 두오모 대성당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우리의 숙소는 한 낡은 아파트에 있던 쪽방을 리모델링한 방 같았다. 물론 창고방 같은 수준은 아니었고, 예쁘게 리모델링이 되어있었다. 여행객이 여행을 할 때 필요한 물건은 어떤 것이 있을까, 찰나를 지내다 가는 여행객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만의 일상과 감각을 느끼게 해 줄까, 하는 고민의 흔적이 두루 보이는 섬세한 방이었다. 새 가구가 아닌 빈티지 롬바르디아 지역의 가구를 가져다 놓았는데, 가구는 반질반질 세월의 기름이 묻어있으면서도 깨끗하고 편안했다. 위로는 아이비 잎을 둘러놓았고, 모두 가품이었겠지만 분위기 있는 미술품들을 걸어놓았다. 숙소는 기품이 있으면서도 간결하고 실용적이었다. 1층에 위치한 덕분에 창문 밖에서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들은 아마 가장 평범한 대화를 하고 있었겠지? 그들은 남과 다를 바 없는 지겨운 하루를 보냈을지 모르지만, 나는 마치 영화 같은 일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도시의 가을바람과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훔쳐들으며, 식료품점에서 사 온 파스타로 저녁을 만들고 맥주를 마셨다.



 


 마쓰시에 마사시의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의 줄거리는 드라마틱한 서사없이 흘러간다. 건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압도적이고 강렬한 건축물보다, 나의 손과 맞닿아있는 일상의 공간이 가지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사람의 시간이 깃든 부드러움이 있고, 일상의 향기가 묻어있는 곳. 그곳에서 귀 기울여 듣는 조용한 소리와 눈 여겨보는 사소한 순간들, 작은 감정의 미동들. 소설은 400쪽이 넘는 시간 동안 그런 사소한 순간들을 예찬한다. 차를 마시고, 새소리와 클래식을 들으며, 제도에 사용할 연필을 깎는다. 사각사각. 누군가의 눈빛에 마음이 작게 흔들린다. 작은 독서대 또는 의자를 설계하면서도 누군가의 일상과 이 가구가 함께할 세월을 생각하며 나무를 고르고 모양을 설계한다. 나의 매일을 이루는 작은 순간과 손길이 닿는 사소한 물건이 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나 또한 그것들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이 소설은 태어남과 동시에 늙어가고 이윽고는 사라지고 마는 삶이라는 큰 외피 안에서 존재의 의미와 아름다움이 되어주는 것은 작지만 조밀한 순간들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일본원제: 화산 자락에서)



 한국에서 보낸 여름 동안, 나는 가족과 잠시 제천을 다녀오고 친척 몇 명과 친구 둘을 만난 것이 전부다. 엄마 아빠의 방 침대에 누워있으면 바깥에 산이 보이고 여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매미소리, 새소리, 어린이들의 피아노 연습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화분을 가꾸고 아빠가 피아노를 연습하는 모습을 보며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집에 있는 모습들의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소리를 녹음하고, 아빠의 그림과 오래된 책을 꺼내보고 엄마의 밥을 먹었다. 엄마와 아빠는 드디어 언니와 나의 짐을 정리하고 당신들의 생활이 묻은 공간을 만들었다. 쾌적하고 편안했다. 핸드폰에 녹음한 소리들을 듣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여름방학 때마다 한국으로 돌아가던 시절에는 매일 같이 "특별한" 놀거리들을 계획했었다. 아침부터 미칠 듯이 북적이는 곳에서 가장 불편한 옷을 입고 가장 자극적인 음식을 사 먹으며 밤 12시까지 놀이를 했다. 핸드폰으로 같은 사진을 수십 장씩 찍고 이 소셜에 올렸다가 저 소셜에도 올리고는 다시 찾아보지 않았다. 항상 크게 웃었고 크게 울었는데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각보다 많은 기억은 일련의 사건보다 공간에서 느꼈던 작은 감각들이다. 생존게임처럼 흘러가는 하루의 사이사이에서 느꼈던 작은 휴식들이 불현듯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르고는 한다. 어릴 적의 나는 거대한 삶의 이벤트를 항상 계획하고 기대했다. 실제로 이런저런 격동의 이벤트들을 겪기도 했지만,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지금도 가끔 언젠가는 화끈한 일을 저질러버리고 말 것이라고 경고 아닌 경고를 한다. 하지만 오늘도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좋았던 어떤 날의 향기와 감촉, 소리, 평범했던 일상을 떠올리며 여름 속을 지난다.

 긴 여름을 보내고 있다. 매해 반복되는 무더운 여름을 간신히 버텨내면서도, 다시 여름을 상상한다.






p. 106

"먹고 자고 사는 곳이라고 한 것은 참 적절한 표현이야. 이들은 뗄 수 없는 한 단어로 생각해야 돼. 먹고 자는 것에 관심 없이 사는 곳만 만들겠다는 것은 그릇만 만들겠다는 얘기잖아? 그러니까 나는 부엌일을 안 하는 건축가 따위 신용하지 않아. 부엌일, 빨래, 청소를 하지 않는 건축가에게 적어도 내가 살 집을 설계해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어."


p. 180

"나눗셈의 나머지 같은 것이 없으면 건축은 재미가 없지. 사람을 매료시키거나 기억에 남는 것은 본래적이지 않은 부분일 경우가 많거든. 그 나눗셈의 나머지는 계산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야. 완성되고 나서 한참 지나야 알 수 있지."


p. 181

어딘가에서 또 쇠딱따구리가 울었다. 끼이 하는 작은, 그러나 분명히 귀에 들어오는 소리. 도서관이 조용한 것은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기 때문이 아니고, 사람이 고독하게 있을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라면, 선생님은 그 공간을 어떤 형태로 만들려는 것일까.


p. 186

아스플룬드의 마지막 일이 된 '숲의 묘지'를 방문하면 사람들은 물결치는 것 같은 완만한 언덕을 오른쪽으로 보면서 길고 낮은 담을 따라 납작한 돌이 깔린 진입로를 곧장 걸어가게 된다. 각자의 걷는 속도에 맞추어 죽음의 세계가 다가온다. 진입로 왼쪽에 있는 낮고 하얀 담은 여행을 지탱하는 지팡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세계와 죽음의 세계의 경계처럼도 보이는 한 줄기 하얀 선. 그 경계는 한참 앞의 막다른 지점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라 지금 현재 살아 있는 우리 바로 곁에 있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하얀 담 너머에 이윽고 예배당과 화장터가 유유히 나타난다. 화장터를 왼쪽으로 보면서 좀 더 가면 마지막으로 사람을 받아들일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소리를 울리기 시작할 것이다.


p. 202

"집을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 설계할 때 불이 잘 나지 않을 집, 지진에 무너지지 않을 집, 그런 것에 가능한 한 신경 쓰지. 그것이 건축가에게는 중요하거든. 그렇지만 말이야, 만일에 도쿄 전체가 전부 불타버리는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내 집만 타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건 좀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아."

선생님이 말씀하시려는 것이 알 것 같으면서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잠자코 있는 나에게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불탄 들판에, 외롭게 자기 집만 남아 있는 광경을 상상해봐. 주위 사람들은 많이 죽었어. 이쪽은 인명은 물론 가재도구도 전부 무사해. 이건 말이야, 견디기 어려운 광경이야. 그런 사태를 사람이 견뎌낼 수 있을까? 마지막은 운을 하늘에 맡기고 천우신조 덕이라고 생각하면 간신히 견뎌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너무 철저하게 방재를 한 주택은 요새지, 주택이 아니야. 살기 편할지 어떨지 의심스러워. 요새에 산다는 건 늘 재난을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과 같으니 말이지."

내 마음속에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 남았다. 그렇지만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될지 몰라서 잠자코 있었다. 십 대 때 목격한 간토 대지진 광경에서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p. 242

"피에로 델라프란체스카는 수학자이기도 하고 건축가이기도 했어요. 건축가는 이 사람처럼 냉철하지 않으면 안 돼요. 돌과 나무를 삼차원으로 조립할 때 정서나 감상으로 임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일본인은 냉철함에 익숙하지 않은 국민이라서 그 탓에 오히려 깊은 상처를 입은 겁니다. 좀 더 빨리 끝낼 수 있었던 전쟁을 그렇게까지 본토가 공습을 당하고도 계속한 것은 냉철함을 멀리했기 매문에 저지른 실책입니다."


p. 271

큰 집이라고 해도 모든 것이 밝고 넓으며 공적인 공간으로 하지 않은 것도 선생님이 만드시는 주택답다. 열린 곳은 마음껏 열고, 닫을 곳은 닫는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기분이 좋아서 주절주절 말할 때와, 멍하니 혼자 있을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거릴 때, 여러 가지 상황에 놓이는 것이 인간이니까, 방도 거기에 맞춰 역할을 분담하는 게 좋다, 고.


p. 274

이만큼 큰 집이 산기슭에 있으면, 공생하는 생물 종류가 많은 것이 당연했다. 졸참나무로 된 미늘 판자벽에는 딱따구리가 뚫어놓은 구멍도 있다. 뱀이나 들쥐도 지붕 밑이나 장작더미 그늘에서 잘 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반지하 덧문 안쪽에 집을 만든 꿀벌은 말벌의 위협과, 넘칠 만큼 많은 꿀의 유혹 사이에서 이렇게 무리를 이루어 살아간다. 말벌의 습격으로 벌집째 없어질지도 모른다. 집단으로 역습하기도 할 것이다.


p. 337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나 하는 이치가 선생님 건축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건축은 예술이 아니다, 현실 그 자체다."라고 선생님이 말씀하는 것은 그런 얘기인지도 모른다.


p. 337

"동굴이나 벼랑 아래 살던 원시인과 움막집을 만든 조몬인은 마음의 존재 양식이 달랐군요."

"아마도. 비를 맞거나, 태양에 이글이글 타거나, 강한 바람을 맞으면 그것을 견뎌내는 것만도 벅찼지. 그러나 움막이라면 아주 잠시라도 밖을 바라보기도 하고 불을 멍하니 보는 여백 같은 시간이 있었을 거야. 인간에게 마음이 싹튼 것은 그런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집안에 계속 있으면 점차 견딜 수가 없어져서 밖에 나가고 싶고, 자연 속을 걷고 싶고,  나무와 꽃을 보고 싶고, 바다를 보고 싶다고 원하게 되지. 인간의 내면 같은 것은 나중에 생긴 것으로 아직 그다지 단단한 건축물은 아니라는 증거일 거야. 집 안에서만 계속 살 수 있을 만큼 인간의 내면은 튼튼하지 못해. 마음을 좌우하는 걸 자기 내부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찾고 싶다. 내맡기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p. 390

사는 사람이나 주인이 바뀌면 주택에 대한 평가가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 (...) 그러나 헐어버리면 그 땅에서의 복원은 거의 절망적이다. 고유한 건축의 수명은 그때 끝나버린다.

동시에 헐어버린다는 기별은 건축가에게 내심 어딘가 안심하게 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적어도 내 경우는 그랬다.

(...)

잘 된 것도, 잘못된 것도 해체하면 똑같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을 마음속 깊이 아쉽다고 생각한 일은 별로 없다. 해체되는 집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하면 그 나름의 운명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건물은 사람이 원하고, 사람이 세우고, 사람이 사는 것으로, 사람과 건축가와 관계는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건물 자체의 완성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p. 410

현관을 들어서자 어두운 실내에는 오랫동안 인기척이 끊긴 탁한 공기가 떠돌고 있었다. 가시에 찔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일층 덧문을 차례차례 연다. 여름 별장에 몇 년 만에 빛이 들어온다. 먼지의 미립자가 떠올라 소리 없는 물의 흐름처럼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이십구 년 전에는 여름 별장을 쓰지 않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p. 414

이상했다.

그러한 실감이나 감정은 지금도 기억 속에서 선명한데, 이만한 플랜이 왜 실현되지 못한 채 끝나버렸을까 하는 강한 개탄은 이렇게 모형을 앞에 둔 지금 내 안에서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p. 415

건축은 준공되고 나서 비로소 생명이 부여된다. 나는 어느새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건축은 이용객과 그 시대에 의해 숨결이 부여되고 살아난다. 그렇게 악취미로 생각되던 니시하라 캐티드럴 성 베드로 대성당도 지금은 주변 풍경의 중심이 되고 조용한 침착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 사람과 시간이 그 대성당을 키운 것이다. 선생님의 국립현대도서관은 이 세상에 모음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대로 흘러, 지나간 세월은 이 모형에 사소한 숨결조차 부여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 플랜의 가치가 훼손된 것은 아니다. 선생님 플랜에 생명이 불어넣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p. 418

어디에선가 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기억에 있는 소리였다. 처음 여름, 매일처럼 들었던 소리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해도 그 새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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