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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피 May 19. 2018

[소년이 온다], 한강  

그 도시의 열흘, 그 후의 삼십팔년



이것은 오월 광주의 이야기입니다, 라고 하면 바로 뒤로가기 버튼을 누를 분들도 계시겠지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생각합니다. 5.18은, 광주는, 이미 너무 거대한 상징이니까요. 광주에 대한 입장을 쉽사리 선악의 가름마로 삼는 태도들이 반복되면서, 그 날 그 곳, 에서 어떤 사람들이 죽고 어떤 사람들이 죽였는지 모르는 이들조차 광주라는 이름에 피로를 느끼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아직 사십 년도 되지 않은 일입니다. 그 도시에는 아직, 여러 집이 같은 날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그 기억을 왜곡하고 조롱하는 인간들이 남아 있어요. 일부 극우 세력 뿐 아니라 소위 말하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 중에서도 말이죠. 아직은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소설은 잔혹합니다. 평론가 신형철의 추천사처럼 "[소년이 온다]는 한강이 쓴 광주 이야기라면 읽는 쪽에서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다고 각오한 사람조차도 휘청거리게 만"듭니다.


그날 그곳에서 있었던 일과,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이 이후에 겪게 되는 일들에 대해- 흐르던 피가 빠져나가 가벼워지고 여기저기 맞아서 움푹 패인 그들의 몸에 대해, 그 몸이 썩을 때 풍겨 나오는 냄새에 대해, 뼈를 으스르고 몸의 감춰진 곳을 짓밟는 고문에 대해 묘사하는 문장은, "거의 원망스러울 만큼 정확한 표현으로 읽는 이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다시, 더 나아가, 살인자들의 무자비함보다는 죽은 자들의 믿음에 대해, 죽은 자들의 비참함보다는 차마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에 대해, 과거의 재현보다는 아직도 살아서 훼손당하고 있는 현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이 더욱 고통스럽지요...


표면적으로 보면, 이것은 '동호'라는 이름의 열 여섯 소년과 그 가까이에 함께 있었던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그날 세상을 떠났고 또 어떤 이는 그 다음 얼마간까지, 그리고 또 어떤 이는 지금까지 살아 남았습니다.


전체 소설은 6장과 에필로그로 이루어져 있는데 1장에서는 80년 그 봄의 열흘을, 그리고 살아남아 갇힌 사람들을,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현재까지, 천천히 시간을 짚으며 전개되고 있어요. 광주는, (소설이 출간된 2014년을 기준으로 하자면) 34년 전의 광주가 아니라 34년 동안의 광주라는 것. '그날'로 박제되지 않고 아직도 살아가고 있는 광주라는 것을 말하고 있죠.   


그러므로 광주는 그날 그들, 의 일이 아니라 오늘 우리, 의 일이 됩니다. 소설의 첫장은 줄곧 주인공 동호를 '너'라는 2인칭으로 호칭하는데요,


...학교 앞 서점에서 문제집을 사려고 혼자 집을 나서 지난 일요일이었다. 갑자기 거리에 들어찬 무장 군인들이 어쩐지 무서워 너는 천변길로 내려가 걸었다. 신혼부부로 보이는, 성경과 찬송가 책을 손에 든 양복 입은 남자와 감색 원피스 차림의 여자가 맞은 편에서 걸어오고 있다. ...(중략) 무슨 일입니까? 지금 저흰 교회에..... 양복 입은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사람의 팔이 어떤 것인지 너는 보았다. 사람의 손, 사람의 허리, 사람의 다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았다. 살려주시오. 헐떡이며 남자가 외쳤다...


'네'가 그날 겪었던 일, 세상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보았던 일들의 증언. 그래서 독자는, '너'를 지켜보아야 만 하는 '나'가 됩니다. [소년이 온다]는 우리 누구도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하며 우리를 단단히 결박합니다. 제목, 소년이 우리를 향해 '온다'고 말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겠죠.


[소년이 온다]는 그날을 고발하고 단죄하는 데 집중하는 작품은 아니에요.  사건의 참혹함보다 그 참혹함을 통과하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모습을 보며 그 다름의 근원을 묻습니다. 이를테면, 왜 어떤 사람은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신념을 택하는가, 왜 어떤 사람은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는 것을 즐기기까지 하는 특별한 잔인함을 보이는가, 왜 어떤 사람은 가까스로 살아남은 후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 왜 어떤 사람은 숱한 치욕 속에서도 부끄러움 없이 버텨내는가- 바꾸어 말하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요.


예술이란 그런 것이겠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 다시 보게 하는 것.


이 책의 저자 한강은 제가 오랫동안 애독해 왔던 작가이지만, [소년이 온다] 이전에는 오랜동안 인간의 바깥보다는 내면에 깊이 침잠하는 작품 세계를 보여 왔습니다. 광주에서 태어나 십 년 동안 살다가 80년 1월에 서울로 이사하면서 그 사건과 엇갈렸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등단 이십 년이 지난 시점에 기어이 이 소설을 쓰게 만들었다고 해요. 자기 작품을 내세우는 데에는 늘 소극적이던 작가가 이 책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고 인터뷰마다 밝히더군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끝난 일이 아니거든요. 아직도 정확한 희생자 수조차 밝혀지지 않았어요. 해외 사이트에서 검색하면 주르륵 뜨는 참혹한 광주의 그날들을, 정작 우리는 배우지 못했거든요. 용산처럼, 공익의 이름을 앞세워 사람이 다치고 죽는 사건들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거든요. 사건을 덮기에 급급하고 오직 가족들만이 깊이 상처입는 상황이 낯설지가 않거든요...


다만- 이 책이 출간되었던 2014년보다는 지금, '그날'이 결국 밝혀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 봅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는 희생자 어머니의 독백이 등장합니다. 그것을 읽으며 저는 사년 전 오월, 다른 희생자의 어머니가 장례식장에 적어 남겼다던 편지를 떠올렸어요. 비극의 앞에서 숭고했던 사람과 잔인했던 사람, 쉽게 잊고 살아가는 사람과 차마 잊지 못하여 살지 못하는 사람, 슬픔에 공감하여 아파하는 사람과 조롱하는 사람이 함께 있는, '그날'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현재를 생각했습니다.


"너는 돌 때 실을 잡았는데, 명주실을 새로 사서 놓을 것을. 쓰던 걸 놓아서 이리 되었을까. 엄마가 다 늙어 낳아서 오래 품지도 못하고 빨리 낳았어. 한 달이라도 더 품었으면 사주가 바뀌어 살았을까. 엄마는 모든 걸 잘못한 죄인이다. 몇 푼 벌어보겠다고 일 하느라 마지막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 엄마가 부자가 아니라서 미안해. 없는 집에 너 같이 예쁜 애를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 엄마가 지옥 갈게, 딸은 천국 가."  - 세월호 희생자 어머니가 딸에게 쓴 편지.


어쩌끄나, 젖먹이 적에 너는 유난히 방긋 웃기를 잘했는디. 향긋한 노란 똥을 베 기저귀에 누었는디. 어린 짐승같이 네발로 기어댕기고 아무거나 입속에 집어넣었는디. 그러나 열이 나면 얼굴이 푸레지고, 경기를 함스로 시큼한 젖을 내 가슴에다 토했는디. 어쩌끄나, 젖을 뗄 적에 너는 손톱이 종이맨이로 얇아질 때까지 엄지손가락을 빨았는디. 온나, 이리 온나, 손뼉 치는 내 앞으로 한발 두발 걸음마를 떼었는디. 웃음을 물고 일곱걸음을 걸어 나헌테 안겼는디. - [소년이 간다] 6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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