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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포토크 Jan 23. 2016

[그토록 소담한] #2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2015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고 있다.

심장이 뛴다. 눈시울이 붉어졌다가 마르기를 수차례. 북받쳤다가 진정되고 치받다가 돌연 서늘해진다. 누군가의 글을 통해 전쟁에 인이 박인 삶을 들여다본다. 슬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역사는 400여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까지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 책은 실화에 바탕을 둔 르포 형식의 소설이다. 내용에 드러난 삶이 실제였을 때를 떠올리면 낯섦과 충격보다 연민과 슬픔의 감정이 앞선다. 1941년 6월 22일 독일 러시아 침공으로 시작된 대조국전쟁(2차 세계대전)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우리나라가 전쟁의 역사, 분단의 아픔을 여전히 현실에서 견뎌내고 있듯이 그들은 오늘도 전쟁 속에 살고 있다.

여자들의 전쟁은 미디어에 노출된 모습과 달리, 소소한 사건과 이야기, 감정선을 타고 흐르는 기억들에 의존한다. 이 책에 소개된 여자들은 1941년 당시 15~18세 정도의 소녀들이었다. 전쟁에 참전한 소녀들은 4년간의 전쟁 끝에 많은 것을 잃었다. 여자의 삶, 감정, 기억, 가족… 또 그들은 소녀의 모습과 웃음을 잃었다. 전쟁 기간, 소녀들은 급히 어른이 됐다.

“보통의 시간은 그렇게나 빨리 그렇게나 몰라보게 사람의 얼굴을 바꿔놓지 않는다. 사람의 얼굴은 긴긴 시간을 통과하며 서서히 변한다. 그리고 그 얼굴에 아주 서서히 그 사람의 영혼이 새겨진다. 전쟁은 재빨리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 속에 새겨넣었다.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넣었다.”

(319/629p)

조국을 사랑하라고 배우며 자란 소녀들은 전쟁과 죽음의 실체를 전혀 모른 채 앞다투어 전쟁터로 나갔다. 전쟁이 끝났을 때, 여자들은 승리의 기쁨을 잠시 누렸을 뿐이다. 남자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여자들은 수십 년간 전쟁 참전 사실을 숨긴 채 침묵 속에 살았다. 전쟁 참전은 곧 여자의 삶을 포기함과 같았으니까. 전쟁을 경험한 여자와 결혼할 남자는 없었고, 부모와 형제도 수치를 당해야 했다. 소녀들은 오랫동안 전쟁의 흔적을 지우려 애썼다.

나이가 든 전쟁 참전 소녀들은 당시 자신의 결정에 고개를 젓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자신의 무지와 무모함을 탓한다. 그들에게 남은 건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 악몽과 질병, 말할 수 없는 진실에 부딪힌 벽이다. 작가는 이들이 두 개의 전쟁을 치렀다고 말한다. 하나는 지옥과도 같았던 처참한 죽음의 현장과 또 하나, 용기와 승리의 역사로 남은 전쟁의 명예다. 두 개의 전쟁. 그러나 전쟁에서 살아남은 모두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리고 자신이 조국과 정치적 이념을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내던질 만큼 순수하고 용맹했음을 고백한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가렸을 뿐이다.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는 전쟁터에서 여자로서 사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겼지만, 이내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여자들은 무슨 말을 해도, 심지어 죽음을 언급할 때조차도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빠뜨리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아름다움은 여자를 여자로서 존재하게 하는 이유였다.”(377/629p)

여자들은 전쟁 중에도 자연의 경의로움, 생명의 소중함, 작은 배려와 추억이 깃든 소품, 아름다움에 대한 본능을 간직했다. 남자와 다른 시선들. 여자들의 전쟁은 사랑, 행복, 기쁨, 절망, 슬픔, 아픔의 시간이다. 전쟁에도 감정이 있으며, 친구, 가족, 연인, 동료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었음을 기억하게 한다.

나이든 전쟁 참전 소녀들이 오랜 침묵을 깨고 자신의 전쟁 기억을 쏟아낸 이유는 뭘까? “당신이 연락하면 다들 기뻐할 거야. 기다리고들 있어. 전쟁의 일을 떠올리는 건 끔찍하지만 그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끔찍하거든.” 작가는 이 말을 듣고 ‘이제 알겠다. 그들이 결국은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를…’이라고 되뇌었다. (253/629p) 그녀가 ‘영혼에 대한 이해’라고 명명한 이야기들. 이 책은 영혼의 삶이 남기고 간 흔적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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