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젊은이스럽기'를 그만두었다.
대학시절 본 영화 <트레인스포팅>은 내게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무능하고 게으르고 찌질하고 우울하며 비열한, 너무도 ‘청춘답지’ 않은 청춘들이 감히 서사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아무도 응징당하거나 평가받지 않은 채 이야기가 끝났다. 패기나 도전정신, 유쾌함과 반항심 같은 것을 젊음의 의무로 알고 있던 내게는 그 영화의 존재 자체가 일종의 파격이었다.
그날 처음으로 청춘의 가치를 의심했다. 의심하려 들자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 모두가 젊음을 특권이라 말했지만 돌이켜보니 정작 나는 그것을 실감한 적이 없었다. 체력과 의지는 어떤 세대의 전유물이라기보다 개인의 속성에 가까웠고, 경험이 적어 나오는 순진성과 서투름은 ‘특권’이라 부르기에 좀 빈약해 보였다.
주변을 둘러봐도 그랬다. 내 또래들의 삶도 근본적으로는 중년이나 노년의 그것과 별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자기 몫의 숙제를 풀며 하루하루를 헤쳐나갈 뿐, 자신의 나이에 희열을 느끼거나 자부심을 갖는 이들은 드물었다.
청춘의 가치를 찬미하는 건 오히려 스스로 젊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지나 보아야 알 수 있는 무엇이 있다고 했다. 그들 중 누군가는 요즘 젊은이들이 과거의 자신과 같지 않다고 책망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이 젊었을 때 갈망했던 것들을 지금의 젊은이들이 너무 쉽게 흘려 보내고 있다고 한탄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수십 년의 시간을 살아오는 동안 자잘한 일상들은 걸러지고 큼직한 기쁨이나 슬픔만이 기억에 남았을 테고, 그것들이 더러는 한으로 또 더러는 미담으로 다듬어지며 청춘이라는 환상에 살을 붙였을 것이었다. 그 전 세대도 전전 세대도 그래왔을 테니 그걸 단지 어느 집단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부분을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그렇게 빚어진 과거의 청춘이 ‘요즘 것들’을 주눅들게 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수많은 찬사와 회한과 자부심과 눈물이 덧발라진 젊음의 규격은 굉장히 견고해서, 우리는 그것에 몸을 맞추거나 아니면 청춘이기를 포기해야 했다. 틀리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젊음의 미덕이라 칭송 받는 세상에서 젊은이들이 청춘답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한다는 건 참, 웃을 수 없는 아이러니였다.
그 모든 것을 목격한 순간부터 나는 ‘젊은이스럽기’를 그만두었다. 의지든 패기든 발랄함이든, 딱 내가 버겁지 않을 만큼만 꺼내놓자고 마음먹었다. 타고난 게으름이나 소심함 같은 것들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젊음은 누군가에게 보답해야 하는 선물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삶의 한 구간일 뿐이니까. 모든 나이가 그렇듯.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언젠가 배우 윤여정 씨가 "60이 넘어도 인생을 모른다. 나도 67살은 처음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크게 공감했었다. 맞는 말이다. 매일 매 순간이 처음인데 누군들 무섭지 않을 수 있을까. 겁내지 않는 젊음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모든 젊음이 용감할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젊음은 타인의 환상에 복무하는 도구가 아니다.
나는 지금 청춘이 아니라, 인생의 어느 날을 살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