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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프리맨 Jul 15. 2024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겠지.

그냥 써 보는 이야기 13

낯선 향기. 와이셔츠에 묻은 색조.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남편의 와이셔츠를 무심코 집어 들었다 발견했다. 머릿속에선 크게 잘못되었다는 듯이 경고음이 강하게 울리고 있었다.


"뭐 해. 나 배고파."

"어? 어어 금방 차려~"


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들었던 와이셔츠를 황급히 세탁기 안으로 밀어 넣었다. 분명 내 잘못이 아닌데 어째서 나쁜 짓을 하다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이러는 거지?


그런 날 남편은 차갑게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뭘 하냐는 듯. 말 없는 눈빛엔 추궁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마치 당장 밥을 차려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둘도 없이 친한 내 친구 이현주. 중학교 때 전학 오며 우연히 알게 된 인연이 결혼 후까지도 이어질 줄은 몰랐다. 사실상 내 유일한 친구다. 오늘은 모처럼 점심을 함께하기로 했다. 우리 둘 다 아이는 없는 관계로 만나는 데 제약은 없는 편이다. 물론 아이가 없는 사정은 각기 다르지만.


"혜인아.. 넌 어때?"

"응? 뭐가?"

"아니 그냥. 잘 지내나 해서."

"뭐 잘 못 지낼 게 있어?"

"그거야 알 수 없지. 난 이혼하기로 했어."

"뭐엇!?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다. 사실 현주는 결혼 생활 내내 힘들어했다. 오랜 구애 끝에 마지못해 승낙한 결혼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성적인 끌림은 없던 상대. 하필이면 그때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됐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 살다 보면 정들고 그러는 거지.

- 그런가?

- 응. 어차피 시간 지나면 다 비슷해. 나도 콩깍지에 씌지만 않았어도..

- 그렇겠지? 그냥 살다 보면.. 시간이 많이 흐르면 편안해지는 거겠지?

- 그렇다니까.


확신하지 말걸. 나도 잘 못살면서 누구한테 감히 훈수를 둔 건지.


"미안해 현주야. 내가 그런 소리만 안 했어도.."

"뭐가~! 내가 살아보니 아니라서 이혼하는 건데 뭘 그러냐! 그냥 남자가 별로라서 그래. 신경 쓰지 마. 이래서 내가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진짜 미안해. 내가 뭐라고 그런 말을 했을까? 나도 앞가림도 잘 못하면서."

"됐어. 밥 먹자. 입맛 다 떨어지게."


 친구에게 닥친 이혼이 내 탓인 거 같은 감정은 그 뒤로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언급하는 것도 바라지 않을 테니. 솔직히 말하면 위기를 겪고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 아닐까?


"저.."

"응? 말해. 뭘 자꾸 머뭇거려. 너답지 않다?"

"하아.. 아니야."

"뭐야. 김 빠지게. 나보다 더 충격적인 얘기 꺼낼 거라도 있어?"


그래. 뭐 상담 정도야.


"그게.. 있잖아. 남편이 바람피우는 거 같아."

"뭐? 경수 씨가? 이 미친 인간이 진짜."

"아니.. 그냥 내 상상이야.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뭔데. 그렇게 생각한 이유나 들어보자."

"와이셔츠를 빨려고 보니까.. 거기에.."


갑자기 나도 모르게 작은 구슬 같은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뺨을 타고 흐르는 가 싶더니 어느새 내 손등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혜인아! 너 진짜.. 무슨 일 있구나?"

"아아.. 미안해. 끅.. 나중에. 나중에 말할게. 지금 말 못 하겠어."

"괜찮아. 일단 진정 좀 해."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현주도 굳이 캐내려 하지 않았고 괜찮아지면 다시 만나자고 했다. 역시 내 친구. 너라도 있어서 천만다행이야.


'그런데 남편은 대체 왜 바람을 피울까?'


나도 모르게 남편의 바람을 확정 짓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인정해 버리는 거야? 확실하지도 않은데?'


남편은 결코 바람피울 사람이 아니다. 변하지 않는 사람 없다고 하나 내가 아는 남편 신경수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덴 뚜렷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지만 나름의 신뢰는 있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고 얘기해 볼까?'


그러고 보니 우리 둘이 대화 나눠본지도 오래됐네. 입을 닫은 건 사실 남편이 먼저였는데.




"다녀왔어. 배고프다."

"어. 왔어? 고생했어."


평소처럼 대답 없이 옷을 풀어헤치더니 곧장 샤워하러 들어가 버린 남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현관부터 화장실까지 가는 동안 단 한 번도 날 쳐다보지 않았다. 마치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인 양.


'나도 사람이라고.. 감정이 있는 사람이란 말이야. 이건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불만이 한순간 터져 나올 뻔했지만 애써 억눌렀다. 오늘은 일단 밥을 먹고 대화를 시도하자.




"저. 경수 씨 밥 다 먹었으면 우리 얘기 좀 하자."


달그락달그락- 이미 다 비운 밥그릇에 남은 거라곤 밥알 몇 개가 전부이건만 애써 내 말을 무시한 채 숟가락질이 한참이다.


"듣고 있는 거 다 아니까. 얘기 좀 해. 피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이혼하자."

"뭐?"


달그락 거리던 숟가락질이 멈추자 남편은 대뜸 이혼통보를 했다.


"못 살겠어. 이게 제대로 사람 사는 모습은 아니잖아? 아.. 아니다. 애초에 난 사람처럼 사는 거 이미 포기했어. 사람의 자격이 없어."

"여자 생겼니?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 말을 하지 말걸. 하지만 이미 입에서 독한 말을 쏟아낼 준비는 완료됐다.


"그러게. 그렇게 생각해. 언제까지 이혼해 줄 수 있어? 빠르면 좋겠는데. 아.. 집은 당신 가져."

"뭐라는 거야! 내가 언제 집달래? 대화하자고 한 게 전부잖아! 바람 폈으면 폈다. 나 네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아서 못 살겠다! 차라리 욕을 하고 소리라도 질러!"

"나 오늘 나가서 잘게. 오늘 한 말은 번복하지 않을게. 그리고 전화도 하지 마."


남편은 그렇게 집을 나가버렸다.




"현주야! 나 어떡해."


전화 걸 곳이라곤 현주 밖에 없었다. 내 생각만 하느라 시간대도 생각을 못했다. 잠결에 전화를 받은 현주는 피곤해 보였다.


"으응.. 왜.. 무슨 일인데?"


하지만 나 외에 누군가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쏟아내지 않는다면 이대로 터져버릴 거 같았다.


"경수.. 경수 씨가.. 이혼하재. 끄흑.. 나.. 어떻게 해? 난 이혼 못하겠어. 나 어떻게 살지?"

"혜인아. 기다려봐. 내가 갈게. 혹시 집에 남편 있어?"

"흑... 아니 집 나갔어. 내가 다 망쳤어. 내 탓이야."

"진정하고 기다려. 금방 갈게."




'말을 꺼냈으면 안 됐는데. 머저리.. 멍청이.'


줄곧 마음속에 담아왔던 의심을 쏟아냈을 뿐인데. 열지 말았어야 하는 상자였구나. 나만 닥치고 있었다면 모든 게 유지됐을 텐데.


자책 중에 현주가 왔다.


"차근차근 말해봐."

"나도 몰라 현주야. 갑자기 이혼하자더니 나가버렸어. 나 그 사람 없인 못 사는데. 내 잘못이야. 내가 괜히 여자 생겼냐고 그래서.."

"그게 왜 너 잘못인데! 바람핀 새끼 잘못 아냐?!"

"아니야. 그렇게 말하지 마. 그 사람 그런 사람 아니야. 그냥 내가 괴롭히고 싶어서 그렇게 말했어. 다 내 탓이야."

"바보야! 그런 게 어딨어. 부부 사이에 신뢰 깨지면 그걸로 남남인 거 몰라? 이혼을 앞두고 있는 내가 이딴 말하는 게 우스운데. 아니면 그냥 갈라서면 돼. 그런다고 인생 끝나지 않아. 정신 차려."


'아니다. 이건 전부 내 탓이다. 나만 얌전히 집구석에서 있었다면 우리 가족이 이렇게 될 리도 없었어.'


내 생각해 주는 현주의 말이 마치 방패에 튕겨나가듯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저기. 요즘 드라마 너무 뻔하지 않냐?"

"그러게. 차라리 웹드라마가 더 재밌는 거 같아. 어째 소재가 맨날 비슷해. 내가 써도 저것보단 잘 쓰겠다."

"그러니까 말이야. 작가들 아주 날로 먹어. 그냥 막 치정물 이런 거 막장으로 쓰면 시청률 잘 나오는 줄 안다니까. 미국이나 영국 같은 데서 만드는 작품 보라고. 얼마나 다양하냐 소재부터."

"그만 보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켜져 있는 모니터 화면 에선 한창 주인공 혜인의 막장 열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알고 보니 바람피운 상대는 믿었던 친구 현주였다나. 경수와 혜인 사이에 있던 자녀에게 생긴 일도 알고 보니..


탓-


"자 나가자!"

"뭐 먹을까?"

"맛있는 거!!"


열린 현관문 사이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이 오늘따라 유독 포근하게 느껴지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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