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걸음
내성적이고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
하던 일만 하고, 가던 곳만 가고, 집에만 있어도 충분한 행복을 느끼는 사람.
자주 누군가를 만나지 않아도 몇 줄의 문자 만으로도 충분한 위로를 얻는 사람.
지금도 비슷한 성향이지만 결혼 전의 내 모습이었다.
"되게 재미없게 산다? 무슨 낙으로 사냐?"
회사에서 만났던 형이 물어봤던 말이다. 나와 전혀 다른 성향 탓에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던 사이었었는데 이상하게도 친분이 생겼었다. 그는 나의 생활에 치를 떨다가도 가끔은 진심으로 궁금해져서 물어보곤 했다. 대체 너의 삶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재미]가 있기는 한 거니?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나 또한 형이 느끼는 삶의 재미를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어느 날에는 서로의 경계선을 맞대고 회담을 열어보기도 했다. 한발, 아니 반발자국만 앞으로 내밀어 서로의 삶에 스며들어 보기로 했다.
"내가 너랑 술자리 가지면 사람이 아니다! 근데 그건 왜 읽냐?"
"나도 마찬가지예요. 난 카페 가서 입 터는 게 훨씬 좋아요. 이건 이러이러한 부분이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어요. 혹시라도 찾던 질문의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해서요."
"너도 차암.. 드럽게 재미없게 산다. 그래도 뭐. 그게 너니까."
삼류소설에나 나올 법한 대화를 주고받던 사이. 그래도 쿨하게 인정할 건 인정하는 형의 성격이 좋아 보였었다. 나로서는 절대로 형처럼 행동하지도 못할뿐더러 생각과 시도를 하지 않았을 테니까.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미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 입장에서 [IF..]를 고민할 이유는 없겠지만 가끔 쓸데없이 떠오르는 상상 중의 하나다. 내 생각에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굉장히 음침하게 살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왠지 사람을 조금씩 멀리하기 시작하다가 급기야 회사와 집만 오고 가는 극단적인 삶의 방식을 택하진 않았을까?
"내 생각도 그래. 내가 오빠를 사람 만든 거야. 내 희생으로 널 사람 만들었다고!"
전적으로 공감한다.
'난 원래 이런 사람이라, 이렇게 살 거야.'
생각의 틀에 갇혀서는 절대로 깨지 않으려 했을 거다. 누구도 깊은 곳까지 도달하지 못하게 꽁꽁 마음을 숨긴 채, 사회적인 가면을 바꿔 써가며 대인관계를 유지했으리라.
그리고 자녀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집을 떠나 어딘가로 간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 같다. 당연히 운전도 하지 않았을 것이며, 아이를 위해 뭔가를 하는 내 모습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과 출산은 그토록 폐쇄성 짙은 나 같은 사람도 어쩔 수 없이 변하게 만드는 힘이 존재했다. 지금처럼 가족과 함께 어딘가로 함께 먹으러 떠나고 즐기러 다니는 여행이 있는 지금의 삶에 감사할 따름이다.
개인이 가질 수 있고 헤아릴 수 있는 이해의 폭은 어떻게 정해지는 걸까?
아무래도 평범한 나 같은 이는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영역이라 생각한다.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알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존재할 테고, 그나마 내게 허락된 경험으로 인해 영역을 살짝 넓힐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늘 경험에 목마르다. 하지만 목마름과 달리 행동은 귀찮고, 새로운 시도도 힘겹다. 그나마 [가족]이 있기에 강제로라도 할당된 혹은 해결해야 할 경험이 존재함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모두가 똑같은 경험을 할 필요도 없고, 이해의 폭이 비슷할 필요는 없다. 단지 자신의 삶을 원하는 방향으로 행복감을 느끼며 살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성공에 가까운 거 아닐까? 단지 난 자신이 없었다.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건 적었고, 외로움이 취약했다. 덜 외롭고 싶어 내 옆에 사람이 있기를 언제나 꿈꿨었다.
'부디 외롭지 않게 해 주세요.'
과한 욕심이었을지도 모를 소원은 아내에 의해 이뤄졌다.
"내가 그 꿈을 이루게 해 줄게. 나만 믿어‼️"
그 이후로 내 삶은 덜 외로워졌고, 더 안정적으로 변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그녀 덕이다.
"너 뭐 샀니?"
좋은 분위기를 망칠 더 이상의 첨언은 생략하겠다.
애초에 세상은 당연한 게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따져보면 당연하게 생각하는 나와 네가 있을 뿐이다. 주어진 매 순간이 당연할 수 없음을 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 참 피곤하게 사네. 그럼 뭐 숨 쉬는 1분 1초에 다 의미 부여하게요?
그럴 순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숨 쉬는 것조차 당연하지 않은 현상이긴 하지만 그렇게 모든 찰나의 순간까지 의미부여를 하다간 상상에 치여 살게 될 거다. 다만 이제부터라도 의미 부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언젠가 지금의 순간을 떠올리며 "그때 좋았었지."라며 웃음 짓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잊지 말자.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자리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도 빛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빛을 발하고 유지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임을 잊지 말자. 오늘 하루도 헛되지 않게 내게 주어진 혹은 허락된 감정과 경험을 만끽하자. 그렇게 지나가 버리는 하루를 또한 기억하고 기록하자. 언젠가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무수히 많은 기록이 내게 또 다른 경험을 제공해 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