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걸음
머리카락을 자른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예전엔 이발비를 아껴 보겠다며 스스로 몇 년간 머리를 직접 자르기도 했었는데, 들쑥날쑥한 스타일이 되어버렸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다 보면 또 괜찮게 느껴졌었다. 아무래도 이런 마음은 나뿐이었는지 하나같이 보는 사람마다 머리에 대해 한 마디씩 하곤 했다.
"제발 미용실 가서 자르면 안 될까?"
그중에는 아내의 말도 섞여 있었다. 내 딴에는 열심히 심혈을 기울였다고 생각했건만 보는 이에겐 우스꽝스러워 보였나 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미용에 대해선 배워본 적도 없고, 하다 못해 유튜브에서 [셀프로 머리 자르는 법]으로 검색을 해본 적도 없었다. 단순히 감에 의지해 눈에 보이는 앞머리를 삐뚤빼뚤 일자로 대충 자르고 튀어나온 옆머리와 뒷머리를 다듬고 나면 TV속 기안84의 머리와 비슷한 형태가 되어버렸다. 셀프 헤어 컷을 해본 적이 있는 분이라면 머리스타일만 보고서도 분명 공감대가 들거라 생각한다.
결혼 후엔 한동안 펌만 했었다. 이전까지는 돈을 아끼겠다며 직접 자르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결혼식을 준비하며 가장 큰 스트레스 중 하나가 머리였는데, 아내한테 반협박조로 의견을 제시했었다.
"콘로우? 평상시 자르던 머리 그대로 갈까?"
"제발 정신 차려라 인간아. 그러고 싶니?"
"아니 뭐 머리가 중요한가."
"어 중요해. 그래도 사진이랑 영상이 남을 텐데 좀 깔끔하게 하면 안 돼?"
아내 기준의 깔끔함과 내가 추구하는 깔끔함 사이엔 간극이 있었다. 하지만 결혼식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신부이니 그녀의 의견에 따라야 뒷날이 편안해지리라. 결국 고심 끝에 일단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미용실에 들른 건 실로 오랜만이었는데 머리상태를 보자마자 미용사의 표정이 심상찮아졌다.
"손님.. 설마 머리 직접 자르고 있으세요?"
"네!"
"휴우..."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미용사와 아내의 눈이 마주치며 소리 없는 대화가 진행되었다. 눈빛만으로도 서로에게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기술이라니.
"머리 어떻게 해드릴까요?"
"아 그러니까.."
내 말을 황급히 자르고 아내가 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그동안 맺힌 게 많았는지 구체적인 지시가 뒤따랐다. 그제야 미용사도 표정을 풀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본인 동의 없이 주변인들의 합의하에 내 머리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우리나라의 분단상황이 문득 떠올랐다.
- 그건 심각한 오버인데?
무리수였음을 인정한다. 여하튼 머리카락은 내 머리에 붙어있건만 상관도 없는 둘이서 의견을 조율하더니 몇 가지 안을 제시했다. 이미 하얘진 머릿속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열심히 얘기하는 미용사껜 미안했지만 억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내 마음도 중요한 거 아니겠나.
"자 그러니까.. 이런 스타일도 있고. 흠.. 아니면 펌을 해볼까요?"
"퍼엄?"
살면서 펌을 해본 적이 있던가? 20대에 한번 해봤다가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고 "너무 못생겼잖아.."라며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머리를 잘 관리하는 타입도 아니라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걱정 마세요. 요새는 짧게 옆머리와 뒷머리를 다듬은 상태에서 펌을 하는데, 깔끔해 보일 거예요."
제안받은 여러 스타일 중에서 고민이 시작됐다.
"오빠. 내 생각엔 이 머리가 제일 나아 보이는데?"
"글쎄.."
"이것도 괜찮을 거 같고."
"흐음?"
"이 머리를 해볼까? 깔끔해 보인다."
"호옹?"
참을 인 세 개 이상을 바라기엔 무리였던 것인가. 아내의 표정이 변하려 하고 있었다. 한 마디만 더 잇는다면 그 뒤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래. 난 차라리 펌을 해볼게."
"펌? 갑자기? 흐음.. 어울리려나? 괜찮을 거 같기도 하고. 그래!"
생각보다 흔쾌히 의견이 일치해 버리는 바람에 거진 10년여 만에 펌을 하게 됐다.
"짜잔! 다됐습니다."
거울 속엔 낯선 토인의 상이 맺혀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펌의 완성 또한 얼굴이거늘. 내 얼굴을 무시했는가?
"원래 펌 처음 하면 어색해요. 자 이제 머리 감고 드라이해드릴게요. 스타일링 된 모습 보면 만족할 거예요. 이 정도면 컬도 잘 나왔고."
전혀 공감할 순 없었지만 일단 시간과 돈을 들여했으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자. 어떠세요?"
내 대답보다 아내가 먼저 맞받아쳤다.
"훨씬 낫네요. 속이 다 후련하다."
"그으래? 그렇단 말이지?"
솔직히 이상해 보였는데 두 명이 괜찮다고 하니 혹하는 마음이 생겼다. 최소한 아내될 사람이 상업용 멘트를 치진 않겠지. 그렇게 또 몇 년 간 돈은 좀 들었지만 지속적으로 펌을 했었다.
요즘은 특별한 스타일을 추구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서 멋에 대한 개념이 사라져서 그런가? 그렇다기엔 멋을 추구해 본 적이 있긴 했었나?
미용실에는 2-3달에 한번 방문하곤 한다. 특별히 큰 요구 없이 최대한 비슷한 형태의 머리를 유지 중이다. 딱히 해보고 싶은 머리 스타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기본컷에서 끝나는 편이다.
"좀 싼 동네 미용실로 가면 안 돼?"
"요즘 가격이 올라서 그렇지. 특별히 비싼 건 아니야. 그리고 지금 덥수룩한 머리를 보면 알겠지만 2-3달에 한번 가는 것도 많이 가는 건 아니라고."
"그런가? 난 더 안 가는데.. 일단 알았어."
년에 4-6회 정도 방문하면 대략 80,000원 - 120,000원이 드는 셈이다.
'이 정도면 다른 구독 서비스에 비해 크게 비싼 편은 아닌 거 같은데.'
요즘 들어 다시 직접 머리를 잘라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 마라? 다시 또 십 년 전으로 돌아갈 셈이야? 그때 내 친구들이 하나같이 오빠 머리 왜 저 모양이냐고 그랬단 말이야. 그냥 돈 써서 잘라‼️"
돈 든다고 뭐라고 할 땐 이런 방법으로 해결하시라. 합법적이고 깔끔하게 돈 문제에서 벗어나게 되었지 않나. 그리고 하나 고백하자면, 사실 가끔 앞머리나 튀어나온 옆머리 정도는 몰래 자르고 있었단다. 그러니 가끔씩 아내가 오해하며 "이상한데? 왜 돈 내고 머리를 자르는데 예전 스타일처럼 보이는 거지? 미용실 바꾸는 게 어때?"라고 했던 말에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미용실 가는 일만큼 세상에서 귀찮은 일이 없다. 가서 앉아할 얘기도 없이 초점 없는 눈으로 넋 놓고 있는 일도 나름의 고역이다. 물론 그런 표정의 손님을 대하는 미용사의 기분도 생각은 해야겠지만. 얼른 글을 쓰고 오랜만에 머리나 다듬으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