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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프리맨 Nov 14. 2024

곁을 내어주다.

161 걸음

"오빠 난 가끔씩 지금이 꿈처럼 느껴져."


웬만해서는 감성적이지 않은 아내가 오늘따라 왜 이러지?


"나도 그렇긴 해."

"어떻게 하다 여기까지 와서 살고 있는지 신기해. 그리고 가끔 내 옆에 아이들이 있는 것도 그렇고."


[진돗개 1호 발령‼️]


대문자 T에 가까운 성향을 가진 아내가 감성적으로 되었다는 건 뭔가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런 때일수록 감정선을 잘 살펴서 대처해야 한다.


"그야.. 우리가 이사오기로 계획하고 정했으니까 여기로 온 거겠지? 아이도 마찬가지-"


말을 잇다가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목이 움츠러들었다.


"어디 더해봐."

"그러니까 이 모든 상황을 꿈처럼 느낄 필요가 없다 이 말이지. 사실은 우리 계획안에-"


아뿔싸. 망했다.


말을 내뱉는 순간 어딘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도 들숨과 날숨을 여러 번 반복하더니 마침내 큰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를 떠났다.


'아니..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거야?'


평소 감성의 영역은 나 하나로 족하다고 생각했거늘, 어째서 오늘은 둘이서 서로 탐하려 한 것일까. 게다가 최대한 이성적(?)이고 현실적(?)으로 일부러 내가 말해줬잖아. 내가 뭘 그렇게 잘못..?


"그만 생각해라? 뭔 말을 못 해. 언제 내 편을 들어주는 꼴을 못 봤어‼ 남한테만 친절한 척하고, 아주 글러먹었어!"


그렇구나. 이번에도 타이밍을 놓쳐버렸구나. 아내이기 전에 여자였음을 명심했어야 했는데. 어째서 바라던 대답을 해주지 않은 것인가.


사실 충분히 원하던 대답을 해줄 수 있었다. 내 아무리 눈치가 없다 해도 결혼까지 한이상 어찌 아내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단지 아내의 기분에 동조해 주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어째서?"


그러게.. 딱히 별 이유는 없는데. 이것은 마치 반대를 위한 반대? 이유 없는 반항? 그런 것과 비슷한 거다.


"그게 당신의 문제점이야. 모든 게 본인 위주거든. 내 이야기 따위엔 귀 기울이고 싶지 않다 이거지."


정말로 난 그런 사람인가? 내 이야기가 아닌 아내의 이야기여서 집중하지 않은 거였단 말인가?




생각해 보면 연애시절부터 아내는 늘 내 의견을 따랐다. 관심 없는 이야기여도 내가 하는 이야기면 귀를 기울였고, 그런 내용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선물을 해주기도 했다.


"자 이거 선물이야."

"오~ 책이네? 오만과 편견?"

"내가 좋아하던 책인데 좀 다를걸?"


자세히 보니 표지부터가 좀 이상하긴 했다. 여자의 눈알이 새빨갛고, 입 쪽을 포장지가 가리고 있었는데 들춰보니 날카로운 이빨에 피가 뚝뚝 흐르는 것이 아닌가?


네에. 바로 이 책입니다.


다시 한번 제목을 살펴보니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라고 적혀 있었다. 


'세상에.. 이런 작품이 있었다고?'


"오빠가 하도 좀비 타령하길래 샀어. 그리고 안에 편지도 썼으니까 나중에 읽어봐."


원래 나중에 읽으라면 당장 읽어야 하는 법.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이.. 부끄럽게."


그런 반응을 즐기며 편지를 읽었다.


'음.. 내용이 많이 부끄럽긴 하군. 책 좀 더 읽게 시켜야겠어.'


물론 입 밖으로 그런 소리를 내뱉진 않았다. 그랬다면 지금쯤 나는 솔로에 출연 문의를 하려고 노력했을지도 모르겠다.


- 나는 솔로 출연할 스펙이나 돼요?


그렇지 참.. 스펙 부족. 그냥 고독하게 살아갔겠구나. 여하튼 이상한 소리대신 감동받은 신들린 연기를 펼쳤던 기억이 난다. 솔직히 감동받은 부분도 있긴 했으니 허언까지는 아니라고 해두겠다.


그 뒤로 우리는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자주 만나면서 연인 사이로 발전하고, 급기야 부부의 연을 맺기에 이르렀다. 그 시절엔 분명 아내의 말에 귀 기울이고 반응해 주고 좀 더 다정했던 거 같다. 왜곡된 기억일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그랬던 거 같다.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생겨서 토라진 아내에게 다가갔다.


"내가 좀 변했지?"

"많이."

"당신 아니었으면 내가 어찌 사람 구실하고 살기나 했겠어?"

"그건 맞는 말이잖아."


여기서 참을 인(忍) 한번.


"아까는 진심이 아니었어. 사실 다 알고 있었다고. 나도 가끔씩 멍하니 있다 보면 지금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이럴 때가 있다고."

"아니 난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닌데? 뭐라는 거야?"


두 번째 참을 인(忍) 발동!


덥석 아내의 손을 잡고 지그시 눈을 바라봤다.


"뭘 쳐다봐? (많이 순화된 표현임. 진짜임.)"


마지막 참을 인(忍)이렸다! 이제는 나도 참지 않아! 분노한 원숭이처럼 폭주하려던 찰나.


"함께해서 그래도 행복해.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폭주를 잠재우는 그녀의 한마디. 어쩌면 나 혼자 그렇게 들었다고 상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상관없다. 우리는 부부니까. 그녀가 나를 필요로 하는 한 절대로 떠날 생각이 없다고.


"필요 없다고 하면 어쩔 건데?"

"그래도 붙어 있으려고. 하하."


그리고 유튜브를 켜고 사이좋게 커피를 홀짝이며 여러 채널을 같이 봤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같이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그녀가 있다는 게 너무나 감사할 뿐이다. 참고로 이 이야기는 오롯이 나의 버전으로만 쓰일 예정이다. 그러니 절대로 그녀의 입장에서 쓰일 글을 나올 일이 없다는 사실. (억울하면 직접 쓰세요.)


마지막으로 한마디 해보겠다. 


혹시나 귀촌 생활을 꿈꾸는 분이 있다면, 꼭 결혼을 고려해 보시길, 혼자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셋 보다는- (이후는 생략합니다. 가끔은 둘까지였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네요. 물론 지금도 많이 좋습니다.)


내 곁에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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