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걸음
[訃告]
故 ooo님께서 별세 하셨기에
아래와 같이 부고를 전해 드립니다.
...
황망한 마음에 일일이 연락드리지 못함을 널리 혜량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침부터 갑작스럽게 날아온 부고 소식에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사람의 생이 다했음을 알리는 건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런데 소식과 함께 속에서는 바쁘게 셈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이 혐오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고인과 나와의 관계가 어찌 되더라?'
'장례식장까지의 거리는?'
가장 먼저 내 머리에 떠올랐던 생각들. 마음 한켠에서는 아직 이른 나이에 떠나게 된 고인과 가족에 대한 안쓰러움을 가지면서도, 머리로는 셈을 하고 있다니. 그저 마음이 착잡해졌다.
"왜 무슨 일 있어?"
때마침 아내가 말을 걸어왔다. 사실 내가 붙잡아서 마지못해 아내가 꺼낸 말이었다. 혼란한 머릿속의 셈을 정리해 주길 바라며 아내를 끌어들였다.
"부고.. 소식을 들었어."
"어떤 분인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휴.. 직접적인 지인도 아닌데. 알아서 해. 그렇지만 모르겠다."
선택을 떠넘기려던 내 계획은 무산됐다.
한번 만난 사이였다. 그는 고등학교 동창과 함께 일하는 사이였고, 첫 만남부터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줬었다. 다소 새로운 만남에 경계하는 나와 달리 수더분해 보이던 그의 모습이 생각난다.
30여분 남짓한 대화의 시간을 끝으로 우리는 다음을 기약했다. 물론 정확히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자고 정했던 건 아니었다. 단지 예의였을 수도 있고 언젠가 한번 정도는 같이 만나도 좋겠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우리는 전화번호 대신 인스타그램의 주소를 공유했다. 그도 나처럼 SNS에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공유하는 즐거움을 아는 이였기에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좋은 사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SNS 속 그는 바빠 보였다. 사업가였기에 만나러 다니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게시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 그는 위트 있고 활동적인 사람처럼 보였다. 나와는 정반대의 성향이었기에 한편으로는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했다. 비록 한번 봤던 사이였지만 온라인상에서 서로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해줌으로써 훗날의 만남 정도를 기약했던 건 아니었나 싶다.
자꾸 [한번]을 강조하게 된다. 아마도 스스로 합리화시키고 싶어서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고작 한 번밖에 안 본 사이잖아.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그에게 무언가를 하려 하는 것부터가 실례일지 몰라.'
이렇게 나를 합리화시키면 되는 걸까?
모르겠다.
어쩌면 이런 셈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싫고, 떠난 이는 애도하고 싶었기에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고인을 글쓰기의 소재로 쓰는 게 옳은 일일까?라는 고민도 생겼다. 그렇지만 이미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구나. 어떻게든 이 순간조차도 기록하려 하는 난 무슨 생각인 걸까?
고인과 사업 파트너였던 고등학교 동창에게 전화를 걸 자신은 없어서 메시지를 남겼다. 지금까지 내 입장의 합리화만을 생각해 왔던 게 부끄러워졌달까. 동창의 입장에서 떠난 이를 생각하면 어떨까? 가 신경 쓰였다. 사업의 번창을 떠나 함께해 왔던 이가 사라진다면..
그리고 다시 내 마음은 백지상태가 되어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아무것도 생각하기가 싫어졌다.
이 글이 애도의 방식이 되는지조차 모르겠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오지랖인지?'라고 한다면 할 말도 없다.
그래도 떠난 이가 안쓰럽다. 그와의 추억을 간직하며 미래를 그렸을 가족도 안쓰럽다. 내 친구도 안쓰럽다. 이 와중에 내 생각만 하는 속물적인 나도 참.. 그렇다.
다시 또 시간은 흘러갈 것이다. 떠난 이의 시점으로부터도 벌써 몇 시간이 지났을 테니 이미 그의 삶은 과거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이 흘러 그를 기억해 주는 소중한 사람이 적게 남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어쩌면 단 한 번의 만남뿐이었던 나도 이 순간을 잊을지도 모른다. 다시 또 내 삶이 소중해질 테고 주어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차할 테니까.
그런 순간이 다가올 것을 알기에, 글로나마 우리의 짧았던 만남을 기록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쓰면서도 대체 무슨 말을 쓰고 있는 건지, 혹시나 실례되는 내용을 쓰고 있는 건 아닐지 걱정된다. 하지만 내 마음에 악의가 없음을,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비록 비겁한 모습일지라도 이 또한 애도의 방식이니.
마지막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