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16

일기

by 고성프리맨
[일기 1]
이 글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공간에 갇혀 있는 사람이겠지. 공간에 있다 보면 시간에 대한 개념이 사라진다.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하루의 시작과 끝이 가늠이 되지 않으며 나갈 수도 없다. 늘 똑같은 밤이 지속된다. 누군가라도 찾아와 준다면 좋겠다.
[일기 2]
쓸 이야기가 없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오늘은 특별한 순간을 경험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줄 알았던 공간에 여자가 찾아왔다. 평소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었는데 계단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누군가 올라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걸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여자는 자연스럽게 계단을 올라오더니 나를 쳐다봤다. 그렇게 한참을 쳐다봤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려나?’

기대와 다르게 여자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슬픈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그녀는 갑자기 사라졌다.
[일기 3]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자가 사라지고 나니 외로움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여기로 어떻게 올 수 있었던 건지, 왜 왔는지, 나를 바라보던 슬픈 느낌은 어떤 것일지. 일단 작은 것 하나라도 기록으로 남긴다. 제발 다시 찾아와 줬으면 좋겠다.
[일기 4]
인기척이 들려 눈이 떠졌다. 책상에 엎드려서 잠이 들었었나 보다. 누군가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살짝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저번에 봤던 여자다. 눈물이 날 뻔했다. 하지만 눈물이 나진 않는다.

’오늘은 말이라도 걸어주려나?’

그녀도 말을 할 수 없는 건지 이번에도 말을 하진 않는다. 여전히 슬픈 눈빛이다. 내 손을 잡더니 꾸깃한 종이 뭉치를 건네준다. 그리고 다시 사라졌다.

’궁금한 게 많은데. 또 가버렸네..’

건네받은 종이 뭉치를 펴봤다.

[이곳은 악인 김시헌의 공간이다. 살아생전 그는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인도했고 악행이 하늘 끝에 닿았을 때 죽임을 당했다. 죽는 그 순간까지 김시헌의 분노와 복수심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결국 악귀가 되었다. 많은 말을 쓸 수 없다. 나는 홍심이라 하고 너를 구하고 싶다. 나도 공간으로 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내게도 목숨을 각오해야 하는 일. 너희 어머니 정이는 김시헌의 노여움을 샀다. 그의 계획을 망쳐버렸지. 그의 노여움은 대를 타고 이어졌다. 다 죽고 나야 벗어날 수 있겠지.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부터 얘기하겠다. 김시헌을 죽게 만든 측근이 있었다. 그 측근의 후손이 언젠가 이곳으로 올 것이다. 어떻게든 그를 붙잡도록 해라. 가능하다면 결혼과 같은 확실한 증표가 필요하다. 글을 길게 쓸 수 없어 어디까지 전달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뒤에 더 글이 써져 있었던 거 같지만 흐릿해져서 읽을 수가 없다. 본능적으로 이 글을 일기에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찾아온다고? 이렇게 계속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점점 지쳐간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건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여전히 난 혼자 있을 뿐이다. 여러 시도를 해봤다. 창문 없는 밖으로 뛰어내려보기까지 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계속 같은 자리로 돌아올 뿐.




[과거 박혜선의 꿈]


혜선은 갑자기 서늘한 느낌이 들어 눈이 떠졌다.


’언제 또 잠이 들었던 거지?’


주변이 바뀌어 있다.


’이 사람들은 누구지?’


낯이 익지만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안개가 머릿속에 있어서 생각하려고 하면 기억을 방해하는 기분이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강이 보이고 멀리 나룻배가 한 척 보인다. 배에는 누군가 있는 거 같다. 하지만 흐린 날이라 잘 보이진 않았다. 안개에 시야가 조금씩 적응되면서 배에 있는 사람이 보인다. 그의 눈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헉!’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그의 눈빛이 내 속을 꿰뚫어 보는 느낌이었다. 너무나 차가운 느낌이라 몸이 굳어져 버렸다. 매섭게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진다. 살기가 느껴지는 눈빛과 다르게 전체적인 인상은 무표정에 가깝다. 뭔가 입을 씰룩거리려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의 손이 천천히 올라가더니 나를 보며 손짓을 한다.


’가고 싶지 않아. 눈이라도 감고 싶은데.’


내 몸은 이미 저항 없이 강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너무 무서운데 도저히 방법이 없다. 그의 눈을 피하고 싶지만 그럴 수조차 없다.


’아무나 제발 나를 구해주세요.’


간절한 마음을 담아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보내본다. 비현실적인 이 순간이 믿기지 않는다. 물이 입술까지 차올랐다. 허우적대며 어떻게든 살고 싶어 진다. 하지만 마음과 다르게 몸은 전혀 움직이질 않는다.


’사람은 맞는 걸까?’


여전히 그의 눈은 나를 쏘아보고 있다. 배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진다. 시야가 점점 흐려진다. 물속으로 몸이 잠기고 있구나. 너무나 무섭게 물속에서도 그의 눈빛이 보인다. 그리고 아까와는 다르게 재밌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다. 분명 배 위에 있었는데 어떻게 그가 보이는 건지 의아하다. 하지만 생각할 겨를이 없다. 숨이 안 쉬어진다. 식도와 코를 타고 물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진다. 너무 고통스럽다. 몸이 타들어가는 듯한 기분이다.


'이렇게 죽다니. 너무 억울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의식이 흐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