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리
“확신하면 안 되겠지. 하지만 자네 얘기를 들으며 꿈에 나온 아이가 우리 혜리라는 생각이 들었다네. 사실 나도 모르겠어. 내 얘기를 들어서 알겠지만 가족이 다 죽어가는 상황에 정상적인 삶을 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어. 우리 가족에게 생긴 불행인지 저주인지 이 사슬을 끊을 수만 있다면 난 뭐라도 할 수 있을 거 같다네. 어떻게든 우리 창훈이만큼은 살려내고 싶어. 내 목숨과 맞바꿀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너무 힘드시겠어요. 어떻게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도 꿈을 꾼 이상 이 일에서 자유로울 순 없을 거 같습니다.”
”아니야. 괜히 자네까지 우리 집안일에 휘둘리면 안 돼. 내가 너무 많은 말을 했군. 이제 자네도 집에 가야지. 다음에 다시 만나서 얘기 나눌 수 있을까? 그때는 창훈이하고 같이 봐도 좋을 거 같은데..”
”언제든 환영입니다. 제가 창훈이하고도 따로 얘기 나눠볼게요.”
창훈 아버지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신의 존재 앞에 한낱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는 한 걸까?’
창훈이 가족에게 생긴 일에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커졌다. 단순한 꿈으로 엮인 일로 생각하기엔 이상한 점이 많았다.
’혜리 누나도 돌아가신 걸까?’
혜리 누나에 대해 좀 더 물어보지 못해 궁금함이 커졌다. 내일 창훈이를 만나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 집으로 바로 가기엔 머리가 복잡하다. 문득 학부 선배이자 부목사로 생활 중인 만호 선배가 떠올랐다.
’선배하고 얘기 좀 나눠봐야겠어.’
혜리는 마음이 갑갑하다. 알 수 없는 어두운 공간에 계속 갇혀 있고 벗어날 방법도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양초가 있어 앞에 있는 성냥을 이용해 불을 붙여 놓았다. 건물은 짓다가 말았는지 콘크리트 덩어리 상태이다.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서 걸어가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뭐야!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구멍 뚫린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은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는다. 다만 나무가 많이 보이고 파도 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선 해안가 쪽에 위치한 건물인 거 같기는 하다. 하릴없이 앉아 있거나 서성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잠깐만. 발걸음 소리처럼 들리는데?’
밑에서부터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의 인기척이 틀림없다.
’드디어 외롭지 않겠어. 정말 다행이야.’
누군가라도 빨리 올라와서 대화를 나누면 좋겠다고 혜리는 생각한다.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굉장히 신중하다. 깜깜해서일지 한걸음 한 걸음의 간격이 상당히 멀게 느껴진다. 반가운 마음에 올라오는 계단 앞에 서서 기다렸다. 계단 밑으로 올라오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머리가 짧은 걸로 봐선 남자인 것 같다.
’안녕하세요. 엇? 목소리가 나오질 않네.’
당황한 혜리는 손을 움직여 입을 만져봤다. 순간 입술 대신 이빨이 만져지고 보드라운 살의 느낌이 아닌 건조하고 푸석한 느낌의 너덜너덜한 질감이 느껴진다.
”으악!”
말을 걸 틈도 없이 나를 발견한 그 남자는 계단 밑으로 굴러서 떨어졌다. 찰나였지만 그 남자의 눈에 공포가 서려 있었다.
’설마. 내 모습이 무서운 걸까? 이미 죽어서 지옥에 와 있는 걸까?’
하지만 방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도구라곤 찾을 수 없었다.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촛불에 의지해 상상해 보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래도 누군가가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이라는 건 깨달았다. 그리고 아까 굴러 떨어진 남자의 안위가 궁금해진다. 말이라도 할 수 있다면 괜찮은지 물어보고 싶은데.
’잠깐. 내가 죽은 건지 살은 건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인 걸 인지하고 있으니 어떤 상태인진 모르는 거잖아?’
머릿속으로 혜리는 누구였는지에 대해 필사적으로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본인의 이름 외에 과거에 대한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무기력함에 빠져 바닥에 누웠다. 지금이 몇 시인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아무런 체감이 들지 않는다. 언제까지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혜리는 미칠 것만 같았다. 머리가 너무 아파 다시 일어나 서성이기 시작한다. 그러다 다시 양초가 불타고 있는 책상 앞에 가서 앉았다. 책상 위에는 책이 몇 권 쌓여 있고 글을 쓸 수 있는 펜도 몇 자루 보인다.
’책이 있었구나.’
책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런 건 애초에 관심이 없다. 그저 이 막막한 시간이 멎어지고 공간에서 벗어날 수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혜리는 앞에 놓인 책을 살펴보기로 하고 첫 장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