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 걸음
주말을 맞아 살짝 늦잠⎯늦잠이래 봤자 9시 정도였다⎯을 잤다. 오늘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은 영향 탓도 있었겠지만 조금 더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오랜만에 휴대전화로 예전에 찍은 사진첩을 뒤졌다.
5년 전, 4년 전, 3년 전.
부부인 우리는 크게 변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사이 아이들이 부쩍 커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애기티가 가시지 않은 눈부셨던 순간의 기록이었다.
"나 이때 전부 다 기억해."
언제 잠에서 깼는지 아내도 물끄러미 내 폰 속 영상을 같이 바라보고 있었다.
"완전 애기였네. 다시 돌아갈 수 없어서 아쉽다. 살결도 보드랍고 만지작 거리다 잠들면 진짜 좋았었는데."
그러고 보니 사진과 영상 속에는 유독 나만 빠져 있는 게 아닌가.
"오빤 저때도 맨날 피곤하다고 우리끼리 나가서 놀고 오라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영상 찍어서 보내줬던 거야."
생각해 보면 안 피곤한 날이 없었던 거 같긴 하다. 주말만 되면 누워서 쉬기 바빴고 느지막이 점심을 먹고 나면 나가기가 귀찮아져서 다시 소파에 몸을 폭 파묻었었다. 한 손엔 휴대전화 다른 한 손엔 리모컨이 들려 있었다.
"기억하지? 그때 얼마나 한심해 보였는지 알아? 집 앞으로 나가자고 해도 나갈 생각도 안 하고."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만 살았을까. 그저 평일에 열심히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주말은 오롯이 내 휴식시간으로만 사용하고 싶었던 건가. 영상 속 환하고 해맑게 웃는 아이들의 모습을 직접 눈에 담지 못했던 과거가 문득 그리워졌다. 아내의 말처럼 지나간 시간은 다시 되돌아올 리 없으니 나는 그저 영상으로만 눈에 담을 뿐이다.
"이때가 나 더 젊어 보이지 않아?"
그러고 보니 대부분 남은 영상과 사진은 아이의 지분이 대다수라서 아내와 내 사진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내가 찍어줬던 아내 사진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기록으로 남은 아내는 확실히 지금보다 젊어 보였다.
"저때만 해도 내가 청소지옥에 빠져 살 줄은 몰랐어."
어째 불길함이 느껴진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불똥이 튀려 했다. 나는 황급히 주제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5년 전엔 그냥 회사-집 밖에 생각이 없었어. 이유는 모르겠는데 회사 잘 다니면 그걸로 100% 완벽한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아."
"부심 엄청 부리댔지. 솔직히 나도 같이 돈 벌었잖아. 근데 오빠가 나보다 조금 더 번다고 얼마나 나 무시했냐."
"...... 내가?"
"어. 엄청!"
그랬구나. 불똥을 피하기 위해 주제를 바꿔보려 했지만 어떻게든 불이 활활 타오르네.
'아무래도 내가 문제였구나. 내가.'
이렇게 된 이상 정면돌파뿐이다.
"그땐 미안했어. 내가 생각이 많이 짧어서 그만."
"어 엄청 짧았지. 지금처럼 상황이 역전될 줄 알았겠어?"
아내의 손을 살며시 잡았ㄷ... 뿌리쳐졌다.
"어딜 감히! 오빤 나한테 평생 절하고 살아야 해."
그럴게요. 그러려고요.
오래전 기록을 살펴보는 건 감정을 묘하게 만들어 준다.
그날의 상태나 기분에 따라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해 준달까.
'만약에 혼자 살았었다면...'
가뜩이나 찍는 걸 싫어하던 내 성격상 아무것도 남은 거 없이 지워진 시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 존재했던 순간이지만 기억에서 조차 사라져 버린(혹은 잊힌) 시간이었을 게 분명하다.
예전 어른들이 "남는 건 사진뿐이네."라고 할 때는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시계는 왜 이리 빠른 건지. 눈만 떴다 감은 것 같았는데 돌이켜보면 몇 년이 훌쩍 지나있다. 아쉬움 때문에 혹은 순간의 감정 때문에 남겨놓은 기록 하나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문득 지금의 삶 또한 내 생각보다도 더 많이 과분하게 주어졌구나란 생각에 이르렀다.
결혼과 출산을 거쳐 주어진 가족이 있다는 것.
어떻게 우리는 가족이 되어 서로를 바라보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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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5년 전에도 말 못 할 스트레스와 현실에 주어진 난제가 많았을 테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아름다웠고 행복했던 기억만 남았다. 좋은 것만 기록하고 떠올리며 살기에도 빠듯한 삶 아니겠는가.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며 보내는 이 순간을 5년 뒤의 나는 어떤 식으로 떠올리게 되려나.
과거-현재-미래는 알 수 없는 규칙성을 가지고 엮여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과거에도 나는 행복을 바랐다.
그러자 현재가 행복해졌다.
불행이 찾아왔지만,
나는 다시 행복을 꿈꿨다.
결국엔 다시 행복이 찾아왔다.
'글을 써야겠어.'
문득 지금의 감정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엔 글이 남겠지.'
글은 나에 대한 셀카다. 사진으로는 찍기 싫은 내 모습도 글에서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
글로 남기는 기록 또한 사진과 영상 못지않은 역할을 해주리라.
이런 마음으로 나는 미래찬가를 남겨놓으려 하는 것이다.
'좋은 일이 생길 거야.'
'행복한 일이 더 많아지길.'
'오늘 하루도 잘 보내자.'
그리고 나의 바람이 어딘가에 닿아 미래선의 내가 그리고 현재의 나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언젠가 이 글을 읽을 미래의 내가 지금보다 더 많이 웃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기를.
혹은 읽을 누군가도 많이 웃고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