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살, 인연을 믿고 싶었던 김경남 씨 9

by 고성프리맨

“조심히 가. 정말 오랜만에 봐서 즐거웠어.”

”소영아. 데려다줄게.”

”아냐.”

”일단 배가 너무 부르기도 하고 나 집에 가도 할게 아무것도 없어서..”

”아.. 괜찮겠어?”

”응! 가자!”


소영이는 마지못해 경남이 데려다주는 걸 허락했지만 그렇다고 싫지는 않은 듯하다. 걸어가는 동안 둘이 많은 말을 나누지는 않았다.


”경남아.”

”어?”

”너 기억나?”

”어떤 거?”

”예전에 네가 나 안았던 거.”

”엇! 어. 그럼.”


잊고 지냈던 과거의 한 순간이 떠오르며 갑자기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너도 나 좋아했어?”


대답 대신 잠시 생각에 빠진다. 아무 말 없는 경남을 한번 슬쩍 살펴보더니 소영이도 앞을 바라보며 걷는다.


”많이. 정말 많이 좋아했어.”

”뭐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았어. 그리고 슬펐지. 마음을 확인하자마자 떠나야 했으니까. 그때의 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한 번만 안아보고 싶었어.”

”그냥 물어본 건데 왜 이렇게 진지하게.”


말끝을 흐리며 소영이도 부끄러운지 고개를 밑으로 향한 채 걷는다. 둘 사이에 어색하지만 묘한 기운이 흐른다.


”나도 많이 슬펐어. 그땐 어떻게 용기 냈나 모르겠는데 다시 못 본다 생각하니까 몸이 먼저 움직였어. 참 어렸었다 그렇지? 하하.”

”우리 지금도 어리잖아. 그리고 옆에 네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 한국에 오자마자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너무 신기해.”

”그러게. 거짓말 같다 정말. 우리 집 다 왔는데. 저기 단지로 들어가면 돼.”

”아 벌써 다 왔네.”

”벌써는 무슨. 30분 걸었는데? 너무 티 내는 거 아니야?”


소영이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도 좋았다.


”뭐야 왜 웃어! 그럼 내일 보자.”

”응. 잘 가. 내일 연락할게.”


소영이가 단지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돌렸다.


’집까지 걸어가려면 얼마나 걸리려나.’


그래도 주변에 고마운 친구가 있어줘서 행복한 인생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도 얼굴 보고 얘기 나누니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그리고 왠지 느낌이 좋다.


’소영이하고 잘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회가 된다면 꼭 만나보고 싶다. 그토록 바라던 소영이였으니까.


’분명 소영이도 나한테 호감이 있는 게 확실해.’


아까의 대화를 곱씹으며 집으로 걸어간다.




집에 도착해서 시간을 보니 1시간 좀 넘게 지났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와 불을 켜니 퀴퀴한 냄새와 아까 밀어 놓고 간 캐리어가 보인다.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할지 막막하지만 일단 오늘은 씻고 잠부터 자야겠다. 숙소는 원룸 형태로 되어 있고 주방과 욕실이 따로 있는 구조다. 넓진 않지만 남자 혼자 지내기엔 무리는 없을 정도다.

’나중에 엄마가 배로 짐 보낸다고 했는데 그건 좀 오래 걸리겠지.’


입을 옷을 많이 챙겨 오지 못해서 내심 걱정이다. 일단 보일러를 켜고 온수가 나올 수 있게 설정을 한 후 갈아입을 옷을 뒤져서 꺼낸다. 바닥에는 먼지가 많아 보여 내일 꼭 청소를 해야 할 거 같다. 한쪽 구석에는 매트리스가 놓여 있는데 스프링 한쪽이 꺼진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오래돼 보인다. 한숨이 살짝 나왔지만 아까 정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야! 배부른 소리 하지 마. 잠잘 데만 있으면 나도 자취하고 싶다.”


정수가 귓가에 대고 소리치는 듯하다.


’그래. 부모님한테 감사해야지. 그나저나 잠은 어디서 자야 하려나.’


다행히 침낭을 하나 챙겨 온 게 있었다. 오늘은 침낭에서 자고 침구류도 좀 사야 할 거 같다. 씻기 전에 사야 할 목록을 한번 정리해 본다. 그리고 신청해야 할 서비스도 정리했다.


’이 정도면 괜찮을 거 같아. 정수한테 좀 도와달라고 해야겠어.’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치자 피곤함이 한꺼번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크게 하품을 한 번 하고 펼쳐놓은 침낭 속에 들어가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