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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속 Jan 30. 2017

폭설 드라이브 (1/2)

후륜 구동 쿠페로 동해까지

유난히 포근했던 이번 겨울, 수도권에 모처럼 함박눈이 왔고 강원/영동 지방엔 폭설 대란이 일어난 지난 1월 20일의 일이다.


눈이 오면 강원도 산길로 드라이브를 가자던 D군이 정말로 길을 나서겠다며 연락을 했다. 매 계절마다 드라이브의 매력이 있지만 아무래도 겨울은 안전상의 이유로 거동이 많이 제한적인데, 이 날은 봉인을 잠시 해제하고 길을 떠나기로 했다.

 

눈길 달리기에

가장 취약한 차로 간다


잠시후 D가 도착했다. 차는 제네시스 쿠페 3.8 수동 트랜스미션이다. 지레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리지만 무사히 잘 다녀와서 쓰는 글이니 일단 안심하시길.


다 큰 남자들의 동심 섞인 모험심에서 기인한 일이지만 눈 온다고 무작정 떠나는 낭만을 부리기엔 대자연은 너무나 가혹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유사 여행을 하고픈 분을 위한 준비물 목록:
스노우 타이어(필수), 체인, 공기 주입기, 추가 웨이트(쌀, 모래, 벽돌, 여분의 사람 등), 야전삽 등 간이 제설 도구, 차량 정비 공구류, 그것들을 써야하는 상황이 언제라도 올 수 있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 그 외 개인 생(존)필품


D는 자동차 업계 종사자로 전문 지식과 레이싱 트랙에서 훈련된 운전 기량을 갖고 있다. 윈터 타이어가 장착되어 있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월동/구난 장비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여정이었음을 밝힌다. 그래도 살아 돌아오게 해준 신께 천만 번 감사드린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기억 나는 지점들을 기준으로 복기해보니 대략 위와 같다. 목적지를 정해둔 건 아니고 가다 보니 동해까지 다녀왔다. 기왕 이만큼 넘어왔으니 바다를 보자는 쪽으로 결정을 하게 된 것.

고속도로는 어지간해서는 제설이 잘 된다. 눈 쌓인 풍경은 보이지만 길은 잘 녹아 있다. 가평 정도까지 고속도로로 가고 이후 구간은 본래 의도 대로 강원도의 산길을 달렸다.


배후령

첫 산길은 춘천의 배후령이다. 입구에 도착하니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눈밭이 펼쳐졌다. 선행 차량의 타이어 자국이 하나도 없으니 본능적으로 잠시 주춤 했다.

갈 수 있을까?

될까?

안되면 그냥 내려 오지 뭐


어차피 마주올 차도, 뒤따를 차도 없을테니 천천히 올라가보기로 했는데 그 결과는 너무나 허무했다. 발등까지 잠기는 눈밭을 헤치고 금세 해발 600미터의 정상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윈터타이어는 확실히 눈길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다. 참고로 나는 작년에 비슷한 여행을 경험한 적이 있고 그 날도 윈터타이어 덕을 톡톡히 봤다.

아. 이 차가 이리 멋있는 차였던가. 갑자기 애정이 생겨 기념 사진을 몇 장 남겨 줬다. 이 첫 등반이 우리에게는 기준점 같은게 되었다. 주파 가능할 지 불안할 지를 이 곳 노면 기울기나 적설 상태을 기준으로 판단하게 된 것이다.

배후령에서 내려와 국도로 진입해 인제 방향으로 갔다.

이런 큰 길에서는 차 안이 한없이 평화롭다. 운전 잘 하는 친구 옆에 타니 몸도 마음도 편하고 무엇보다도 내가 운전을 하지 않으니 사진을 편히 찍을 수 있어서 좋다.

특별히 -령 이라 쓰여있는 길로 간 게 아닌데 그냥 지방도를 따라 달리다 보니 자연스레 산을 수 차례 넘게 된다. 418번 도로를 타고 한참을 갔다.

이 날 만난 일반 차량은 거의 손으로 꼽을 만큼 적었다. 우리 나라에 제설차가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제설차를 자주 마주쳤다.

제설차는 물론 다가오는 눈길의 복선이다.

예상대로 곧바로 눈밭이 펼쳐졌다. 눈이 없었으면 별 관심 없이 스쳐 보냈을 건조한 겨울 풍경이 이토록 특별해진다.


즐거웠다. 설경 속을 이렇게 실시간으로 생생히 느끼며 달려간다는 쾌감도 있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우리 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마주오는 차, 뒤따라 오는 차 없이 이 풍경을 오롯이 독차지 한다는 기묘한 독점감은 고립감과 정복감 그 사이쯤인 것 같다.


어딜 가더라도 사람, 차, 건물이 빽빽한 밀도로 들어찬 도시로부터 제대로 해방된 것이다. 목숨 걸고 하는 익스트림 스포츠를 하는 사람들의 즐거움엔 분명 이런 기묘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제설차는 제대로 성수기를 맞이했다.

나무에 쌓인 눈의 무게감이 점점 예사롭지 않다. 여기가 한국인가 핀란드인가. 핀란드 가보지도 못했으면서

맞은편에 모처럼 차가 나타났는데 앞으로 우리의 고생길을 고스란히 얼굴에 보여주는 것 같다. 길에 차가 하도 없어서 이렇게 마주치니 잠시 세워 인사라고 하고 싶을 정도다. 저쪽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사진에 눈발이 잘 보이지 않지만 하얗게 눈보라가 일어 시야가 흐리다.

정말 다양한 형태의 제설차가 있음을 이 날 알게 됐다.

딱히 갈림길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기억에 도움이 될까 싶어 간간히 이정표를 찍거나 위치 정보가 기록되도록 아이폰으로 사진을 남겼다.



조침령

이미 강원도에 진입한지는 한참 되었고 눈길을 달리는 일도 이제 조금씩 익숙해져갔다. 곰배령 가는길 표지판을 지나쳐 왔기에 지금 넘는 고개가 곰배령인가 싶었는데 불현듯 '조침령 터널'이 나타났다. 그랬구나. 우리는 조침령에 있는 것이구나.

뜻이 궁금해 찾아보니 흥미롭다.

"높고 험하여 새鳥가 하루에 넘지 못하고 잠寢을 자고 넘었다."고 하여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그나 저나 이제 터널을 지나면 다 내려온건가? 하고 네비게이션 화면을 움직여 이후 경로를 봤는데,

아. 괜한걸 봤군.


내리막에서는 언더 스티어(조향력 상실) 상황이 쉽게 나오므로 충분한 감속이 필요하다. 겨울철 고갯에서 발생하는 사고의 가장 흔한 유형이 바로 이런 내리막에서 조향력을 잃고 돌진하는 것이다.


차가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스티어링 휠의 조향 방향은 무시되고 온전히 자연의 힘에 지배 당한다. 도로는 양쪽 혹은 한쪽 길가 방향으로 경사져 있으니 차가 미끄러지면 진행 방향 우측의 길가 또는 중앙선 넘어 맞은편 길가로 향하게 된다. 차 전체의 방향성은 그렇다는 얘기다. 차 앞이 어느쪽을 향할 지는 알 수 없다.


달려온 속도+관성+도로 기울기 방향의 총합. 거기에 그동안 본인이 착하게 살았는지 정도를 결합하면 예상 생존율을 계산할 수 있다.

눈길 주행 원칙

이런 악천후 주행에서 불변의 원칙은 한 가지다. 느린 속도를 잘 유지 하면 된다. 그 싱겁고도 간단한 걸 어떻게 달성 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런 길에서 흔히 엔진 브레이크를 쓰라고 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ABS와 오토메틱 변속기가 보편화된 요즘 상황에서는 더 디테일한 지침이 필요하다.


브레이크 페달을 다다닥 끊어 밟아 겨우 살았다는 아버지, 할아버지, 택시 기사님들의 무용담은 이제 그만 전설의 고향에 묻을 때가 되었다. 그냥 꾹 밟고 있으면 ABS가 미끄럼을 감지해 초당 수십 회의 속도로 끊어서 제동력을 조절해준다. 브레이크 페달을 끊어 밟아 무게 중심을 자꾸 흔들면 차는 더 쉽게 미끄러진다.

제동은 풋 브레이크를 우선적으로 사용한다. 속도를 줄이고 싶다면 풋 브레이크를 조심스레 밟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ABS장착 차량의 경우) 낮은 속도를 오래 유지할 때 엔진브레이크를 쓰는 것은 유효하나 이 때도 메인 브레이크는 역시 풋 브레이크다.

스핀이 날 경우 그 역방향으로 스티어링 휠을 조작(카운터 스티어링) 하라, 혹은 반대로 차가 미끄러지는 방향 대로 조향을 하라는 등, 별 별 가이드가 다 돌아다니지만 이 역시 절대 함부로 따라할 일은 아니다.


충분한 훈련과 실전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평소 안하던 방식의 차량 조작을 갑자기 영화처럼 짠 하고 성공적으로 해내는 멋진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스포츠 카'나 '모터 스포츠'에서의 '스포츠'는 단지 차가 빠르다는 뜻으로 붙은 말이 아니다. 차를 다루는 일, 즉 운전이 스포츠가 된다는 뜻이다. 학습, 연습, 훈련 없이는 경지에 오를 수 없다.


그러니 프로 드라이버들의 주행 교본은 그냥 연예인들 사는 이야기 보듯 그냥 보고 잊는게 생명을 연장하는 길이다. 겨울 타이어와 월동장비, 그리고 낮은 속도만이 최선의 교본이다.


뭐 이런 류의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우리는 무사히 조침령을 내려왔다. 윈터 타이어 만세

이쯤 되면 '차'가 아니라 '장비'로 불러줘야할 것 같다.


이후 진행 경로를 정하고 고생한 차와 운전자도 한 숨 돌릴 겸 잠시 포토타임을 가졌다. 눈이 달라붙어 포토샵 처리 없이도 번호판이 저절로 가려졌다.

위 지도 상의 4번 경우지 부근이었다. 다시 서울쪽으로 되돌아 갈 지 동쪽으로 더 넘어 갈 지. 동해로 갈 경우 속초냐 양양이냐에 따라 경로가 달라지는 기로에 서있었다.


일단 달려온 길이 아까우니 어쨋든 동해를 보기로 했다. 아래로 내려가 강릉으로 가기엔 너무 멀어 위험부담이 있으니 결국 합리적으로(?) 속초쪽을 택했다.


덕분에 잘 넘어온 조침령을 다시 되돌아가야 했다. 새가 하루에 못 넘는다던 고갯길을 이 눈속에서 연거푸 두 번을 넘는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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