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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비 Mar 27. 2018

당신의 복원지점이 되고 싶다

크리스마스 즈음에. 

* 맥심 2014년 12월호 편집장의 글 중


“때로 음악은 특정한 시절을 소환하는 마법을 부린다. 그리고 내 경험에 의하면, 어려운 시절보다는 좋았던 시절이 소환될 때, 눈물이 왈칵 차올라서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고는 한다. 시간이 흐르면 나쁜 기억들은 사라지고, 행복했던 기억만이 남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것이다.” - 배순탁, <청춘을 달리다>


MAXIM에 음악 칼럼을 기고하는 MBC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배순탁 작가가 <청춘을 달리다>라는 책을 냈다. 작가는 자신이 음악을 직업이 아닌 순수한 취향으로써 접했을 “가장 절박하게 음악을 찾아들었던 1990년대의 뮤지션 열다섯 명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위의 구절은 이승열의 ‘돌아오지 않아’를 듣다가 갑자기 눈물을 쏟은 배작가의 경험담에 등장한다. 누구나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 자신을 통째로 장악해버리는 음악을 만난다. 음악은 때론 함께 울면서 고통을 버텨준다. 특히 멋모르고 병신 짓을 많이 하게 되는 설익은 청춘의 시기에는 반드시 그런 음악이 있다. 수면 위에 거친 파도가 칠 때 심해로 내린 묵직한 닻 같은 존재감을 가진 그런 음악. 나에겐 이승환이다. 


나는 박남정의 ‘널 그리며’가 <가요톱텐>을 휩쓸고, 전국의 어린이가 다리를 가로 세로로 흔들며 ‘호랑나비’를 부르던 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첫 음반도 같은 해에 나왔다. 하지만 나에겐 이미 우뢰매와 심형래, 맹구 같은 히어로가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일기를 뒤져보니, 그해 8월 18일 나는 오빠와 함께 극장에 가서 <뽀식이와 꼬마 특공대>라는 어린이 영화를 봤다. ‘조춘, 김유행’으로 구성된 대머리 듀오 쌍라이트가 극장을 직접 찾았던 것 같다(일기엔 “영화에서 본 것보다 못생겼다”라고 적혀있다). 그해 이승환의 2집 음반 <Always>가 나왔다.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의 피아노 악보 피스를 500원인가 주고 샀지만 여전히 그는 관심 밖 대상이었다. 적어도 ‘쌍라이트’ 형제보다는. 


그의 음악이 내 세계에 닻을 내린 건 ‘천일동안’이 담긴 4집 <Human> 때다. 제집처럼 드나들던 동네 레코드 가게에서 그 테이프를 샀다. 대충 그린 사람 모양을 새긴 그 커버가 그냥 멋있었다. 어린이에서 소녀로 건너가던 길목에서 나는 소년 같이 섬세하고 맑지만 힘이 있는 그의 목소리에 빠졌다. 언제인진 모르겠지만 그가 콘서트 장에서 이렇게 외쳤던 걸 기억한다. 자신의 생식 능력이 다 할 때까지 노래하겠다고.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쩐지 안도하게 된다. 아직 정정하시군요...라고. 겨울이 되면 난 그의 음악을 군고구마나 호빵 같은 ‘계절 음식’처럼 맛있게 듣는다. 매년 연말이 되면 들려오는 그의 콘서트 소식에 소녀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왜 이런 감상적인 이야길 하느냐. 인간은 연말이 되면 한해를 정리하는 아주 이상한 습관이 있는데, 나도 올 한해 세상에 내놓은 12권의 MAXIM을 보며 ‘편집장 이영비의 성적’을 따져보게 됐다. 일단 1월호 완판으로 시작은 참 좋았는데, 5월호 때 세월호 사태로 발행 지연을 밀어붙이면서 손실이 컸다. 독자분들, 윤태진 아나운서, 그리고 우리 회사에 제일 미안하고 고마운 일이다. 그 뒤 신아영 아나와 미스맥심 소희, 이리나 샤크, 레이디 제인과 서유리, 제시카 알바, 이번 낸시랭 커버까지, 올해 총 12개의 잡지를 만들었다. 이 중에서 보는 이의 마음속에 잊히지 않을 그런 특별한 무언가를 한 줄, 한 장이라도 남겼을까? 


이번 12월호는 우리 독자에게 ‘의미’있는 순간을 선사할 수 있는 올해 마지막 기회다. 그래서 더 안달이 나 죽겠다. 일단 당신의 연말 지름을 도울 ‘크리스마스 지름 리스트 69’에 힘을 주었다. 향수나 패션, 게임, 만화, 음악, 연애, 자동차, 스포츠, 경제, 과학이슈와 더불어 진지한 AV(?) 리뷰도 담았다. 낸시랭과 함께한 SM 콘셉트 화보와 올해 미스맥심 결승 진출자들의 역대급 란제리 화보도 준비했다. 뭐라도 하나 당신에게 닿기를 바라며 직구, 변화구, 슬라이더, 너클볼, 에네르기파, 죽어라고 열심히 던져본다. 


음악은 타임머신처럼 우릴 특정 시점으로 안내한다. 2014년 12월, 이번 크리스마스 특별호가 그런 음악처럼 여러분의 기억에 특별한 ‘기억 복원 지점’으로 남길 간절히 바란다. 시간이 흐른 후 어느 날 당신이 이 표지를 봤을 때 “낸시랭 맥심 표지 보니까 생각나네! 내가 그때 뭘 했느냐면...” 이라고 추억하게 되길.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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