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같은 존재에게.
* 맥심 2013년 12월호 편집장의 글 중에서
방금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 눈이다.” “결국 첫눈이!” “그러게. 눈이 오네요.” 어디선가 구석에 처박혀 쪽잠을 자던 놈도 그 소릴 듣고 기어 나와 구경한다. 정신이 온통 모니터, 키보드, 시계에 팔려있던 마감 직전의 에디터와 디자이너들이 고개를 든다. 마감의 주화입마(走火入魔), 말 그대로 ‘불이 달리고 악마가 들어오는 상태’에 빠져있던 나도 직원들과 함께 한참을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첫눈의 약속이나 고백 같은 낭만을 실제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해의 첫눈을 보면 마음이 일렁인다. 저것이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똥이란 걸 알면서도 첫눈의 하늘거리는 고운 자태에 어김없이 설렌다. 이를 어쩌나. 마음이 간지럽다.
준비도 못했는데 이렇게 겨울이 왔다. 꺼내놓은 가을 옷들을 채 입지도 못했다. 지난주부터 겨울 잠바를 입고
출근을 한다. 찬바람에 이가 시린 아침, 입에서 나오는 하얀 김이 출근길 서울 공기 속에 섞이는 걸 보며 겨울을
실감한다. 회사에 와서 조웅재 에디터를 불러 그가 이번호에 담당한 연말 특집 ‘크리스마스 선물 69선’에 대해 회의하다가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진다.
“이 블루투스 스피커 보자마자 갖고 싶었는데, 리스트에 있네!” “그죠. 이쁘죠. 전 이 스마트폰용 렌즈 사고 싶어요. 편할 거 같아요. 그거 보셨어요? <진격의 거인> 가면도 웃겨요. 참, 전에 <진격> 초대형 거인 피규어 세트 사신다면서요?”
“아직 안 샀어. 내가 나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살 거야. 벽이랑 같이 있는 거. 흐흐흐. 풀세트를 갖춰야지.” 그리곤 ‘이걸 지른다’, ‘저걸 지른다’ 하며 수다 삼매경에 빠진다.
연말연시엔 이렇게 온전히 나를 위한 선물을 골라 지르는 게 큰 낙이다. 크리스마스 선물, 송년 선물, 새해 선물,
음력설 선물... 이렇게 명분을 달아서 다 챙긴다. 이맘때는 고마웠던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게 예의가 아닌가. 세상사람 다 마찬가지겠지만, 나에겐 자기 자신이 가장 대견하고, 제일 고마운 존재다. 그래서 한 해 동안 수고한 나에게 선물을 퍼준다. 외롭고 괴로운 일이 유독 많았던 나의 2013년, 두 다리로 버티느라 욕봤다며.
그동안 쌓인 행복한 겨울 추억은 많지만, 눈이 쏟아지는 겨울밤엔 2000년 크리스마스가 생각난다. 함박눈이
하늘에서 내리는지 땅에서 솟는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정신없이 쏟아지던 한밤중, 노란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눈이 발목 위로 쌓이는 줄도 모르고 한 자리에 서서 동갑내기 남자 친구와 얘길 나누던 기억. 그 친구도 기억하려나? 자리를 뜨기 전에 우린 서로 준비한 선물을 주고받았다. 나는 백화점을 몇 바퀴를 돌고 또 돌다가 고민 끝에 산 야구 모자와 목도리를 그 애에게 선물했다. 그 애에겐 정말 이상하게 생긴, 좋게 말하면 예측 불가한 미래적인 느낌의 니트 모자와 장갑을 선물로 받았다. 그 모자가 얼마나 개성 있냐면... 짱구 과자처럼 위가 뻥 뚫려있고, 그 윗구멍은 끈으로 조여 사이즈를 조절할 수 있다. 평소엔 머리수건처럼 얹었다가 끈으로 조이면 배 포장재를 머리에 뒤집어쓴 것 같은 괴랄한 스타일을 연출한다. 게다가 내 가무잡잡한 피부색과 징그럽게 안 어울리는 베이지 컬러. 그런데도 세상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고마워. 니가 최고야!”
갖고 싶고, 필요한 것을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지금과, 갖고 싶거나 필요하지 않은 예상 밖의 선물을 받은 그해
겨울밤. 가격으로나, 쓰임새로나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 분명 ‘물건으로서의 가치’는 높다. 그런데 내가 아무생각없이 했던 “오르골 소리 진짜 예쁘지?”, “나도 <카우보이 비밥> 좋아해!” 등의 말을 기억했다가 고민해서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엔 애틋함이 있다. 그 독특한 모자(쓰고 나간 적은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예쁘게 연주하는 작은 오르골, 예쁘고 쓸쓸한 이야기가 담긴 동화책 <백만 번을 산 고양이>*... 예상치 못한 첫눈을 만날 때의 울렁거림처럼, 값을 따질 수 없는 마음씀씀이로 심장을 따뜻하게 요동치게 만드는 선물이었다.
*<카우보이 비밥>의 주인공 스파이크가 제트(Z)에게 ‘백만 번을 산 고양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 있는데, 그 이야기가 담긴 실제 동화책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적인 물질의 값어치를 부정하고 풋풋한 낭만과 정성만을 따지는 치기어린 순진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살기도 힘들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러라는 얘기도 아니다. 아니 돈 쓰는 재미 없으면 어찌 살아. 그래도 어김없이 겨울눈이 내리면 2000년 그해의 어리고 순수한 내가 가로등 아래 눈을 맞으며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13년 뒤의 자신이, 주고받는 선물의 포장과 가격표만이 아니라 그것을 준비하는 시간과 마음의 가치를 보고, 주는 기쁨을 충분히 즐기며 사는 어른으로 자라길 바라면서.
눈 속에 나를 바라보는 내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