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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 Oct 26. 2024

백(100)의 그림자

새해 D-100 맞이 챌린지에 가려진 회고의 시간

한국인에게 '백 일'의 의미는 특별하다. 그래서 이를 유별스럽게 기념하고 싶은 심정이 드는 것도 마땅하다.






2024년 D-100. 매 년 가을 즈음 반복되는 그 날이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카운트다운을 시작으로 연말까지 수많은 마음들이 바빠지고 손과 발도 덩달아 바쁘다. 올해도 100일밖에 안 남았다는 아쉬움과 함께, 남은 100일동안만이라도 무언가를 만족스럽게 해낸 뒤 한 해를 매듭짓고 싶다는 애정어린 마음이 모여 사람들을 추동하는 때. 


그래서인지 이 시기에는 '스몰 챌린지'나 '1일 1포스팅' 등의 이름으로 자신이 세운 목표를 하루 하루 실천해나가는 SNS 게시물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부지런히 글을 쓰고 이곳 저곳을 바삐 다녀보는 수고를 자처하면서까지 못다 이룬 결심을 완주해보려는 행위는 그야말로 순수한 열정이다.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새해까지 100일밖에 안 남았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면 괜스레 조급해진다.  연초 야심차게 계획했으나 여러 사정과 이유로 흘려보낼 뻔했던 마음가짐을 지켜낼 마지막 기회다 싶은 것이다.


백()일은 예로부터 완성과 결실을 의미하는 길한 수였고, 이를 위해 금계를 지켜 인고한 시간을 기념하는 뜻깊은 날이었다. 단군 신화에 등장하는 곰과 호랑이가 동굴 속에서 햇빛 없이 쑥과 마늘만을 먹으며 견뎌야 했던 기간도, 무언가를 소망하며 정화수를 뜨고 치성을 드렸던 기간도,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축하받는 날도 생일 이전에 백 일이다. 100일을 채워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며 진심을 다하면 정말 이루어지고, 이후에도 좋은 일만 있을 거라고 믿어온 모양이다.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애인과의 100일을 유난스럽게 기념하고, 수능까지 100일이 남으면 학생은 긴장하며 학부모는 백일기도에 들어간다. 오랜 경험과 고유한 비법으로 자리를 지키며 손님들의 미각을 사로잡은 맛집을 백년가게라 칭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장수하길 바라며 덕담으로 '백 살까지 사시라'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백 일의 기간은 가득 차 풍요롭지만 동시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기간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새해까지 백 일 남은 시점에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건 희망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다. 아쉬움을 만족감으로 바꿀 수 있는 절호의 시기이나, 의지와 달리 시간과 노력을 충분히 들이지 못했을 때 스스로에게 크게 상심하여 모든 것을 그만둬버리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물론 성실하고 우직하게 백 일 챌린지를 성공해낸다면 가장 좋겠지만, 만약 달성하지 못한 경우 연초에 세웠던 목표의 방향성이나 그 안에 담긴 나의 초심까지 상실하게 된다면 정말 아쉬울 것이다. 


고요한 일상과 불안한 내일에 생기와 활기를 더해 줄 도전이라면 그게 뭐든 충분히 의미 있지만, 나의 경험상 한 해가 백 일 남은 시점에서 더 만족스러웠던 마무리는 이루지 못한 성취를 새롭게 해냈을 때가 아니었다. 사소한 심경의 변화까지 일기장에 시시콜콜 털어놓던 어느 해, 당시에는 못나 보이고 조금은 부끄러웠던 이 기록들이 나의 불안을 달래 주었다. 지난 일상들을 고요히 돌아보며 좋은 추억과 감사한 마음은 되새겨 채우고 나쁜 감정을 버려내는 시간을 가진 이후에야 '올해도 그럭저럭 괜찮았다'는 만족감이 들었고, 다가오는 내년을 좀 더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는 여유가 생겼다. 무엇보다도 짧게나마 일기를 쓰는 행위 자체가 시간을 들여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점에서 하루의 작은 성공이자 성취다.  


내가 생각하는 회고의 생명력은 실로 엄청나고, 정갈한 회고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직접 쓴 일기다. 일기장 속 귀퉁이 어느 날의 단상과 한 줄의 짧은 기록으로 잊고 있던 자신감이 차오르기도, 스쳐간 인연을 잠시 떠올려보기도 하며, 세웠던 목표를 유독 하기 싫었던 이유를 알아채곤 슬쩍 내년의 목표로 미루기도 한다. 한 해를 아쉬움 없이 만족하며 마무리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새로운 도전으로 경험과 성과를 채워내는 것만큼이나 유의미한 '새해 D-100 챌린지'는 익숙한 나의 기록을 되짚고 자존을 채워 올해보다 더 단단해진 내년의 나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 


만일 당장 써 둔 일기가 없다면 기억을 회상할 수 있는 어떤 흔적도 괜찮다. 인스타그램 속 한 줄의 기록도, 수첩 귀퉁이에 적은 낙서도, 핸드폰 앨범 속 사진들도 어쨌든 나의 기록이니 자신의 방식대로 자유롭게 회고해봐도 좋겠다.


그리고 잊지 말자. 미래의 나를 위하여 이 모든 회고의 과정을 반드시 성심껏 기록해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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