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한히 펼쳐진 구름 위를 비행 중이다. 회사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었고, 최근은 400만원이 넘는 돈을 사기당하기까지 했다. 눈 깜짝할 새에 공중분해 되는 돈과 시간들을 보니 인생이 허망하고 절망스러웠다.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희뿌연 구름이 가득 찬 하늘을 연료도 없이 날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할 수 있는데까지 해보고, 그 다음 더 이상 내가 할수 있는 것이 없을것 같을 때, 도서관에 가기로 했다. 갈까 말까 집에도 책 많은데.. 망설였지만, 재택 근무를 하는 남편이 적극적으로 도서관에 같이 갈 것을 권유했다. 즉흥적으로 골라낸 두툼한 7권의 책들을 양손 가득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틀 만에 두 권의 에세이를 순식간에 읽었다. 이슬아 작가의 최신작 "끝내주는 인생", 헤르만 헤세의 "밤의 사색" 두 권이었다.
이슬아 작가의 문체는 군더더기가 없고 에피소드 자체가 젊은 층에 타겟팅 되어있어서 신명나게 읽어내려갈 수 있다. 예전 "일간 이슬아"를 읽었을 때도 그랬고, 소소한 이야깃거리들을 가지고 독자의 시간을 훔쳐가는 젊은 작가이다. 몇 장 읽자마자 친구가 사기를 당해 수천만원의 빚을 지고, 그 친구가 키우던 식물을 임보해주는 에피소드가 나왔다. 등장인물의 말들에서 발견한 교훈이 있었다.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닌데 별거 아니여"하는 작가의 할머니의 말과, 키 큰 친구가 말한 "빚에 시달리며 세월을 보내고 나면 인상이 고약한 아줌마가 될거야" 하는 말이었다. 이 두 문장은 당장 사기당한 사람이 아니면, 분명 가슴에 와닿지 않고 흘려버릴 문구일거다. 불과 3일전에 사기를 당한 나로서는 마음을 후벼파는 임팩트가 있었다. "그래, 나 아직 죽지 않고 살날이 많이 남았으니 좋은일, 기쁜일이 더 많을거야." "싫어! 나는 고약하게 찌푸린 인상을 하고있는 아줌마로 늙어 죽고싶진 않아." (나는 귀여운 할머니로 늙고싶다..!) 그렇다. 나는 이런 문구 하나에서도 힘을 얻는 사람이다. 아주 잘 깨지지만, 아주 잘 이어붙일수도 있는 사람이다. 이어 붙이기. 또 그 뒤에 이어서 붙이기. 스크래치로 끊어진 내 마음을 소중히 다룰 수 있는 사람이다. 삶이 계속 이어지듯, 상처에 약을 발라 다시 좋은일과 연결하고, 막힌 호흡을 부드럽게 열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 화려하고 아름답게는 아니지만, 곱고 매끄럽게 이 굴곡을 다시 평평하게 이어나갈 힘을 얻었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 때부터 좋아했고, 노벨문학상을 받은 "피터 카멘친트"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다. 이번에 빌린 책은 헤세가 지독한 불면증을 겪을 때의 일기를 모아놓은 글들이다. 대부분이 밤의 여신에 대한 상상이었으나, 앞/뒤에는 헤세의 인생관이 담긴 자조적인 시들이 가득했다. 시는 많은 글자가 없지만, 그보다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획수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빈공간에 내 이야기를 더 많이 눌러담을 수 있다. 누군가는 자조적이고 자기합리화라 비판해도, 나는 헤세가 좋다. 왜냐면 꽉 조이는 청바지를 입은 듯 숨막히는 일상을 달리고 있는 나에게 세계적인 작가가 공시적인 위로를 건네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런 태도를 가지고 평생 글을 썼고, 죽은 후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위로해준다. 사람의 양면성에 대해서 인지하고 받아들이고, 인생의 괴로움을 흘려보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힘내! 화이팅!" 하는 응원보다 그럴 수 있어. "고요히 지나갈거야. 행복은 대단한게 아니야. 행복은 찾는게 아니야. 행복은 일상 속에 있어." 조용히 건네는,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들이 왜 내 마음속에서는 자동생산 되지 않는건지. 마음이 복잡하고 어지러울 때마다 헤세를 꺼내는 이유일테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괴로운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때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곱씹는다.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천둥도, 호랑이도 아닌 망각이라 했다. 나는 오늘도 활자의 도움을 받아 괴로움과 괴로움을 지어낸 행위자들을 갉아내고, 망각해간다.
"네가고통스러운 까닭은 고통을 겁내기 때문이다.
네가 아픈 까닭은 고통을 막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통에서 도망치지 말고, 탓하지 말고, 겁내지 마라.
고통을 사랑하라.
너는 이미 스스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유일한 마법, 단 하나의 힘.
구원과 행복이 마음속에 있고, 그것의 이름이 사랑이라는 것을 너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고통을 사랑하라!
거부하지 말고 도망치지 마라!
고통에 담긴 은밀하게 깊은 달콤함을 맛보라.
고통을 마지못해 억지로 받아들이지 마라!
무엇보다 고통에 대한 거부감이 네게 아픔을 주는 것이지, 고통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귀 기울여 들으면 고통은 훌륭한 음악이 된다.
그러나 너는 고통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너는 항상 고통의 음악과 어울리지 않는 독특한 음악에 사로잡혀 있고,
거기서 벗어나려 하지도 않는다.
내 말을 들어라!
내 말을 듣고 잘 기억하라.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고통은 망상이다.
오직 너 혼자 만들어내고 혼자 아파하는 것이다."
- 헤르만 헤세, '밤의 사색'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