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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각시의 찰나

사사로운 이야기 13

by Jin

부제 : 메밀꽃의 찰나

너무 오랜만에 찰나를 쓴다.


https://youtu.be/oeLHy3dIiXs?si=pLBmkoqetFvqQ1bX

https://youtu.be/vbs-CNhhXhY?si=J-IjmQhDIbCv5KBG

BGM : 돌이킬 수 없는 걸음. 장화홍련 OST



며칠 전 우연히 '부산 근교 메밀꽃밭'에 대해 알게 되었다. 집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통도사의 극락암 가는 길에 있다던 메밀꽃 밭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고 이번 주 주말이 만개일 것이라는 첩보를 들었다.


가야 한다 +ㅁ+)/!!!!

그에게 >> 주말 메밀꽃밭 콜?' >>OK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전날 결연한 표정으로 배터리를 충전하고, 메모리 카드를 챙겼다. 다음 날 아침 일곱 시 반쯤 출발해 여덟 시 반쯤 도착했다. 세상에 무슨 부지런한 사람들이 이다지도 많은 것인지 주차장은 이미 차가 빼곡했다. 나는 차에서 내려 메밀꽃밭으로 한걸음 한걸음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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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Jin



와아.


안개꽃 같은 흰 메밀꽃이 넘실거리며 저 멀리 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들판을 뒤덮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풍경은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향을 맡으려 큰 숨을 들이쉬었지만, 향이 나지 않았다. 메밀 특유의 구수한 향이 날 것 같았던 건 볶아지는 과정을 겪어야만 나는 것이었을까.



IMG_8102.JPG Photo by Jin



그때, 붕. 붕. 붕붕- 하는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공기의 진동으로 느껴질 정도라니. 한 마리가 아닌 수십, 수백 마리의 삶의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생이 소리를 낸다면, 어떤 소리를 낼까. 뷰파인더에 눈을 가져다 대고 빠르게 벌을 쫓아 보지만 벌은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나에게 찰나를 허락하지 않았다. 쳇.



IMG_7998.JPG Photo by Jin



대신 '호리꽃등에'라는 이름을 가진 귀요미가 나에게 찰나를 허락해 주었다. 이 친구는 이름대로 꽃을 좋아하며, 몸통이 호리호리한 편이다. 분류학적으로는 곤충강(lnsecta)에 속하지만, 파리목(Diptera)에 해당한다. 벌처럼 보여 비슷한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실은 목에서 갈라져 다른 길을 걷는 녀석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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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Jin 왼) 메밀꽃밭 25.09.28 오) 집근처 25.09.26



그리고 나의 뷰파인더에 걸린 또 다른 친구는 나비다. 색이 화려하지 않아 나방으로 보일 수 있지만, 더듬이의 끝이 방망이 처럼 둥근 곤봉형인 것과 날개를 세우고 앉는 특징이 있어 쉽게 나비로 구별할 수 있었다. 이 나비의 이름은 석주명 박사님이 '유리창나비'와 닮았지만, 들판을 떠들썩하게 날아다닌다고 해서 붙여준 '유리창떠들썩팔랑나비(Ochlodes subhyalinus)'으로 추측해 본다.



IMG_7870.JPG Photo by Jin 25.09.26



팔랑나비라니. 이 얼마나 귀여운 이름인가. 이 친구의 귀여움을 만끽하다 그 옆을 또 다른 작은 생명이 파닥이며 날아올랐다. 그 모습에 아이는 '엄마. 저거 벌새 아니야?' 라고 물었다. 나는 그 말에 벌새라는 별명을 가진 '박각시'라고 말해주었다.



SE-993d9933-b655-4641-9480-eb1d6a044943 (1).jpg Photo by Jin / 최고 베스트 사진 /



박각시는 나비와 나방이 모두 포함된 큰 분류인 나비목(Lepidoptera)에 몸집이 크고 날개가 날렵하며, 공중에서 정지비행(hovering)하는 특징을 가진 무리를 뜻하는 박각시과(Sphingidae)로 볼 수 있다. 박각시의 이름에서 '박'은 여름철에 피는 박꽃을 의미하고, '각시'는 예쁘게 날아다니는 모습을 의인화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SE-c5ecc374-c07d-41f8-9bea-a2cac2ecc984.jpg Photo by Jin / 처절한 나의 실패 샷.



이 친구는 수 많은 박각시 중에서도 '검은꼬리박각시'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엄청 빠르게 날아다니기에 자세히 관찰하기가 매번 찰나를 찍기도 어려웠지만, 나는 이 날 계를 탔다고 표현하고 싶다. 수십마리의 검은꼬리박각시를 메밀꽃밭에서 만났기 때문이었다. 처절한 나의 실패 샷은 핀트가 나간 사진임에도 마빡이를 연상하게 하는 사진을 보며 혼자 쿡쿡 웃었다.



SE-5002c6bb-aa5f-4a0b-8b94-59f45e1be6f5 (1).jpg Photo by Jin



지금 내 카메라는 보급형이라 셔터가 '찰칵' 하고 찍히는 게 아니라 이 정도 어둡기면 '차알카악' 하고 느릿하게 찍혀버린다. 한 장 찍고 나면 이 귀여운 녀석들은 늘 저 멀리 달아나버리기 일쑤였다. 빽빽한 틈 사이에서도 얼마나 날렵한지. 그래도 수십마리의 박각시들이 있어 나는 허허실실 한 마리를 놓쳤다고 슬퍼하지 않아도 되었다.



SE-dcffd77e-5011-4afe-8707-8184119afeeb (1).jpg Photo by Jin



이 친구는 메밀꽃밭에서 찍은 검은꼬리박각시와 다른 외형을 가진 '벌꼬리박각시'로 추정된다. 메밀꽃밭에서 부터 비가 오락가락 구름이 잔뜩 드리운 환경이었지만, 피씨에서 확인한 사진을 보며 충분히 만족했다. 게다가 수십 마리의 박각시라니 +ㅁ+)/ 셔터를 누르며 브런치 찰나에 오랜만에 글을 적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메밀꽃밭도 아름다웠지만, 박각시의 귀여움에 대해서 자랑하고 싶어서.



SE-60d14669-d8b1-47b3-9a4a-f5402a4b6676 (1).jpg Photo by Jin



마지막 사진은 잘 찍힌 건 아니지만, 배초향 밭에서 와글와글 무리를 지어 날아다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그냥 올린다. 배초향이라 하면 조금 생소할지 몰라도, ‘방아’라 하면 누구든 알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방아꽃을 이렇게 좋아할 줄이야! 발을 동동 구를 만큼 귀여운 녀석들. 그리고 그렇게 작은 날갯짓으로 삶을 버텨내는 모습이 어찌나 대견한지.



SE-c55ebfef-6a85-43fe-a1ac-0bfa00ea2d2b.jpg Photo by Jin



배터리가 다 되어 카메라는 잠시 쉬게 두고,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을 찍었다. 귀여움에 다리를 동동 구르자 그는 “내년에 또 오자고 하겠네.” 하고 말했다. 나는 ‘어떻게 벌써 아셨을까?’ 라는 눈빛으로 웃어 보였다. 그는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방아밭 가득 박각시를 이렇게 많이 본 것은 처음이라며 동생도, 아이도 모두 신기해 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외쳤다. <거봐, 출사 다니니까 이렇게 진귀한 것도 보잖아!> 라며, 어깨에 삼단 뽕을 넣은 듯 절로 으쓱 올라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단 한 번의 삶』을 펼쳐 들었다. 김영하 작가님의 <인생은 일회용으로 주어진다.>라는 첫 문장이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 최근 행복에 지름길이 있나요를 마무리하며, 무겁디무거운 놋숟가락 같은 삶 말고, 베스킨라빈스 31의 핑크빛 플라스틱 숟가락처럼 가볍고 즐겁게 살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내 시선과

손끝에 담아낸

사진들 덕분에,

앞으로 일주일은

그에게 한껏 친절할

수 있을 만큼

행복으로 가득

채워졌다.


다음 주 행복은

또 어디에서 충전하면 좋을까.

그 상상만으로도 설렌다.


이것이

단 한 번 주어진

찰나의 삶을

사는 나의 방식.




by Jin / with my phone



동영상은 슬로모션으로 매우 귀엽습니다.

작은 날개짓을 구경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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