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메밀꽃의 찰나

사사로운 이야기 14

by Jin

메밀꽃밭에 관한 초입 내용이

'박각시의 찰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박각시의 찰나를 읽고 오시면,

좀 더 깊이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jinf4sb/142






하루 종일 바라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풍경들에 한참을 넋을 놓았다. 모니터 너머로 본 세상에 내가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다른 사람들이 올려준 사진과 영상을 모니터 밖에서 그저 만족해야 했던, 메밀꽃밭에 내가 지금 이 순간 서 있다는 사실이 황홀한 것인지. 메밀꽃밭이 황홀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헷갈리지만.



SE-3f97abc3-8cec-4d7c-ac08-6a7a65a76f11.jpg Photo by Jin



메밀꽃밭 초입에서 눈을 못 떼고 멍하니 서 있으니 그가 나에게 '안쪽으로 가자. 안쪽이 더 예뻐.'라고 말을 건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안 쪽으로 가면 눈에 면적이 좁아져서 그래 조금 더 여기서 볼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보는 시선과 내가 보는 시선에는 차이가 있고, 혼자 온 것이 아니기에 나의 욕심을 양껏 채울 수 없었다.



IMG_8346.JPG Photo by Jin



사진 찍기를 멈추고 천천히 걸었다. 사진을 찍느라 시야가 좁아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나는 종종 그렇게 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였다. 뷰파인더 속 세상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고, 만들어 낼 수 있다. 주변 상황은 전부 무시한 채로. 그렇기에 그 세상은 내가 두 눈으로 보는 풍경보다 언제나 협소해지기 마련이었다.



IMG_8341.JPG Photo by Jin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해가 고개를 내미는 듯하더니, 어느새 구름이 잔뜩 몰려와 하늘에 눌러앉았다. 금세라도 비를 퍼부을 태세로, 축축한 바람을 몰아 보내며 으름장을 놓았다. 바람에 끝없이 늘어선 흰 물결이 출렁였다. 투명한 파도가 바위에 부딪칠 때 새하얀 포말이 일듯, 메밀꽃도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서로 꼭 껴안은 줄기들이 부딪혀 새하얀 포말을 만들어 냈다.



IMG_8338.JPG Photo by Jin



바다에서는 파도가 밀어칠 때마다 바다 특유의 짠 향이 난다. 그러나 메밀꽃은 아무리 바람이 거세게 밀어쳐도 그저 서로를 의지한 채 하늘하늘 흔들려 끝없이 흰 포말만 만들어 낼 뿐. 향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어째서 메밀꽃에서도 구수한 향이 날 것으로 생각했을까.



IMG_8357.JPG Photo by Jin



왜일까.

눈앞이 흐러졌다.

초점이 흐려진 것인지



SE-bf2c40d0-5d97-4db1-817c-d9e61ca1068e.jpg Photo by Jin



가볍게 살고 싶은 마음을 담아 사진을 찍어 보지만 자꾸만 마음이 무거워진다. 나는 또 이 새하얀 포말에 이리저리 길을 잃은 채 굴러다니는 모래알이 되었다. 꽃이 전부 다 지고 나서야 자신의 향을 낼 수 있는 메밀꽃이 아무것도 모르고 말갛게 웃는 어린 날의 나와 겹쳐 보여서.



IMG_8467.JPG Photo by Jin



그럼에도 메밀꽃의 삶이 찬란하게 보이는 것은,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어주는 삶을 살고 있다. 잠시 머물 수 있는 쉼터가 되어주고, 거센 비를 막아주는 지붕이 되어 주며, 짧은 생에게 살아낼 작은 위로가 되어주는 존재. 오래도록 그 풍경을 눈에 새겨두었다. 잊지 않기 위해.



IMG_8442.JPG Photo by Jin



존재에 이유가 별건 가.

다 이유가 있겠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