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로운 이야기 14
메밀꽃밭에 관한 초입 내용이
'박각시의 찰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박각시의 찰나를 읽고 오시면,
좀 더 깊이 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jinf4sb/142
하루 종일 바라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풍경들에 한참을 넋을 놓았다. 모니터 너머로 본 세상에 내가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다른 사람들이 올려준 사진과 영상을 모니터 밖에서 그저 만족해야 했던, 메밀꽃밭에 내가 지금 이 순간 서 있다는 사실이 황홀한 것인지. 메밀꽃밭이 황홀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헷갈리지만.
메밀꽃밭 초입에서 눈을 못 떼고 멍하니 서 있으니 그가 나에게 '안쪽으로 가자. 안쪽이 더 예뻐.'라고 말을 건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안 쪽으로 가면 눈에 면적이 좁아져서 그래 조금 더 여기서 볼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보는 시선과 내가 보는 시선에는 차이가 있고, 혼자 온 것이 아니기에 나의 욕심을 양껏 채울 수 없었다.
사진 찍기를 멈추고 천천히 걸었다. 사진을 찍느라 시야가 좁아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나는 종종 그렇게 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였다. 뷰파인더 속 세상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고, 만들어 낼 수 있다. 주변 상황은 전부 무시한 채로. 그렇기에 그 세상은 내가 두 눈으로 보는 풍경보다 언제나 협소해지기 마련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해가 고개를 내미는 듯하더니, 어느새 구름이 잔뜩 몰려와 하늘에 눌러앉았다. 금세라도 비를 퍼부을 태세로, 축축한 바람을 몰아 보내며 으름장을 놓았다. 바람에 끝없이 늘어선 흰 물결이 출렁였다. 투명한 파도가 바위에 부딪칠 때 새하얀 포말이 일듯, 메밀꽃도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서로 꼭 껴안은 줄기들이 부딪혀 새하얀 포말을 만들어 냈다.
바다에서는 파도가 밀어칠 때마다 바다 특유의 짠 향이 난다. 그러나 메밀꽃은 아무리 바람이 거세게 밀어쳐도 그저 서로를 의지한 채 하늘하늘 흔들려 끝없이 흰 포말만 만들어 낼 뿐. 향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어째서 메밀꽃에서도 구수한 향이 날 것으로 생각했을까.
왜일까.
눈앞이 흐러졌다.
초점이 흐려진 것인지
가볍게 살고 싶은 마음을 담아 사진을 찍어 보지만 자꾸만 마음이 무거워진다. 나는 또 이 새하얀 포말에 이리저리 길을 잃은 채 굴러다니는 모래알이 되었다. 꽃이 전부 다 지고 나서야 자신의 향을 낼 수 있는 메밀꽃이 아무것도 모르고 말갛게 웃는 어린 날의 나와 겹쳐 보여서.
그럼에도 메밀꽃의 삶이 찬란하게 보이는 것은,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어주는 삶을 살고 있다. 잠시 머물 수 있는 쉼터가 되어주고, 거센 비를 막아주는 지붕이 되어 주며, 짧은 생에게 살아낼 작은 위로가 되어주는 존재. 오래도록 그 풍경을 눈에 새겨두었다. 잊지 않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