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로운 이야기 15
통도사 메밀꽃밭으로 게시글이 세 개로 뻥튀기되고 있다. 하지만 사진을 찍을 때 마음이 다 달라 같은 게시글에 넣을 수 없었다. 특히 나비는 내가 좋아하니까 '박각시'와 또 다른 게시글로 다루어 주고 싶었다.
https://brunch.co.kr/@jinf4sb/142
https://brunch.co.kr/@jinf4sb/145
메밀꽃밭에서 내가 좋아하는 나비를 보았다. 이 나비는 나비목 네발나비과에 속하는 남방씨알붐나비(네발나비, Polygonia c-aureum)로 추측된다. 이 이름은 뒷날개에 선명하게 새겨진 C자 무늬에서 비롯되었는데, 학명 역시 같은 이유로 'c-aureum'로 붙여졌다고 한다. 도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나비지만, 드넓은 메밀꽃밭에서 마주하니 더 반갑게 느껴졌다.
이 친구들은 태생적으로 겁이 많아 가까이 다가가 촬영하기가 쉽지 않다. 눈앞에 아무리 탐스러운 꽃이 있어도,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면 멀리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날아다니는 흰 물결 사이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다는 걸 아는 듯 여유롭게 이리저리 팔랑거리며 날아다녔다.
이 메밀꽃에 앉았다가 날아오르고, 저 메밀꽃에 내려앉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은지 다시 날아올랐다. 마치 메밀꽃이 다 다르기라도 한 듯. 어찌나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지 뷰파인더 속 작은 세상에서 녀석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어지러워졌다. 뷰파인더에서 시선을 거두고 넓은 시야로 끊임없이 날아다니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다 똑같아 보이는 메밀꽃이건만 저 녀석에게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참을 메밀꽃 사이를 쇼핑하듯 날아다니던 녀석은 마침내 제 마음에 드는 메밀꽃을 찾은 듯, 천천히 날갯짓을 멈추고 내려앉았다. 우리 모두가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듯, 어쩌면 저 녀석도 자신만의 취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메밀꽃의 어떤 부분을 보고 자신의 취향임을 알아차린 걸까. 꽃이 핀 모양? 꽃의 색? 나는 맡을 수 없는 향기? 햇살이 오래 머무를 것 같은 자리? 궁금해졌다. 확고한 너의 취향이 무엇이냐 묻고 싶었지만, 고작 몇 미터일 뿐인 녀석과 나의 거리는 지구와 달의 거리만큼 느껴졌다. 나의 질문에 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으니까.
메밀꽃에 위에 앉은 네발나비의 찰나를 놓치기 싶지 않아 본능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저 녀석이 날아가려는 속도보다 내 손끝이 더 빠르기를 바랐다. 희망과 절망, 실패와 성공이 눈 깜빡이는 그 찰나의 순간에 결정되기 때문이다. 셔터를 누르는 내 손은 조급해지고, 빛을 받아 잔상을 남기는 '찰칵' 소리는 오늘 유난히 더디게 들렸다. 다행히 저 녀석은 내가 셔터를 더 이상 누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물러주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은 뒤에 거의 난사 수준으로 찍은 사진들을 확인한다. 초점이 빗나간 사진, 빛을 과하게 머금은 사진, 빛을 머금지 못한 사진, 저 녀석이 유령처럼 보이는 사진. 그 사진들 속에서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기까지 몇 번의 셔터를 눌렀는지 헤아리기 어렵다. 사진이란 게 원래 그렇다.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을 위해 수십, 수백 번의 시도가 필요한 작업이었다. 내 삶이 그러하듯.
네발나비를 뒤로 하고, 메밀꽃밭을 정처 없이 헤매었다. 바람에 밀려드는 저 바다의 흰 포말처럼 새하얀 메밀꽃이 흰 물결을 만들었다. 그 흰 물결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을 구경했다. 서로를 꼭 붙들고 있어서일까.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풀의 특유의 사락사락 이는 소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어 흔들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같아 나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귀에 선명하게 들어온 건 메밀꽃들의 숨소리가 아닌, 곤충들의 붕붕거리는 삶의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릴 뿐이었다. 작은 생명들이 바쁘게 살아 움직이는 그 순간이 공기의 진동으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런 곤충들의 분주함을 나와 함께 바라보는 구경꾼이라도 된 듯, 메밀꽃은 숨소리를 감췄다.
소란과 적막 사이 웃음이 터진 나에게 또 다른 나비가 나타났다. 너무 멀리 있어 작은멋쟁이나비 또는 큰멋쟁이나비로 추측해 볼 뿐이었다. 이 녀석 또한 마음에 드는 메밀꽃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전부 똑같이 생긴 저 메밀꽃에 어떠한 취향이 반영되어 있는 거냐고 정말로 묻고 싶어졌다.
나도 언젠가 저 녀석들이 선택한 메밀꽃처럼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날이 있을 수도. 그렇지 않은 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메밀꽃이 자신을 간만 보고 스쳐 지나가면 잠시 섭섭할 순 있겠지만 뭐 어떻게 하겠는가. 자신의 세상이 무너질 일은 아닐 테였다. 저 녀석들의 마음이 그렇다면, 그렇구나! 하고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음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