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a와 함께 한 순간
국민학교 시절이긴 했는데 몇 학년 때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3학년이나 4학년이었을 거라 추측한다. 당시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버지가 전축을 사기로 마음먹었고, 호기심이 넘치던 나는 제품을 구경하러 몇 번 따라나섰던 기억도 있다(아마 세운상가였던 것으로).
당시는 SONY를 위시한 일본 제품이 상당히 인기를 끌던 시기인데, 국내 브랜드로는 태광, 인켈 등이 꽤나 프로모션을 많이 하곤 했다. 아무튼 어느 날 드디어 집에 배달된 제품은 롯데매니아였고 바야흐로 우리 집에도 LP 시대가 열리게 된다.
당시 사은품으로 LP 두 장과 CD 3장을 받았는데, CD는 마스터피스 클래식 모음집이었고 LP는 Papa Don't Preach가 수록된 Madonna의 True Blue 앨범과 A-ha의 Stay on These Roads 앨범이었다. 솔직히 당시에 마돈나에겐 관심이 없었다. 이와 달리 아하라는 그룹은 그 유명한 Take on Me 뮤직비디오를 오마주(혹은 표절?)한 조용필의 맥콜 광고 덕분에 어렴풋이 알고 있던 그룹이었던지라 LP에 바늘을 올리는 낭만을 느끼고픈 국민학생의 손은 자연스럽게 아하 앨범으로 향하곤 했다.
그 이후 역시나 자연스럽게 팝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우연히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에서 들은 Billy Joel의 Honesty가 어찌나 맘에 들던지, 용돈을 잘 모아뒀다가 동네 레코드 가게에 가서 Honesty가 수록된 52nd Streeet를 구매했던 기억이 있다. 나의 첫 LP구입. 당시 가게 사장님은 어린애가 와서 올드팝 LP를 사가니 신기해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처음'이라는 건 이렇게 기억 속에 더 많은 영역을 점유하며 내 삶과 함께 한다. 2021년엔 <아-하. 테이크 온 미>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현재 넷플릭스에서도 시청이 가능)하기도 했는데 아하의 광팬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보고 싶어 영화관으로 향했다.
무엇이 됐건 내 인생의 어느 지점엔가 BGM이 되어준 노래와 함께 하는 것, 내가 나이 드는 만큼 함께 나이 든 왕년의 스타들의 모습을 보는 건,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일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 다 잘 살고 있다는 공감을 형성하는 계기도 되는 것 같다. 비록 예전의 매끈한 외모가 아니면 어떠한가, 경험과 관록이 아로새겨진 모습이 더 멋지지 아니한가.
아이폰 유저에 음악 어플도 애플뮤직을 사용한다. 애플뮤직이건 스포티파이건 요즘 음악 어플의 지능이 워낙 뛰어나지만, 개인적으론 랜덤 플레이나 애플 뮤직의 큐레이션보다는 여러 가지 장르와 테마로 플레이리스트를 직접 만들어서 듣는 걸 선호한다. 며칠 전엔 LP의 추억을 떠올리며 A-ha와 Duran Duran을 섞은 리스트를 만들어 출근 시간을 함께 했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길들여진다는 의미처럼, 무언가 내게 의미가 생기는 순간이 있고 그 순간은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다. 2010년 아하의 조국인 노르웨이 Oslo에서 Spektrum Concert가 열렸다. 아하를 애정하는 수 많은 관객들, The Living Daylights 후렴구를 떼창 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도 나와 유사한 경험과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현재의 과학기술로 물리적인 시간여행은 불가능하지만, 우리를 순식간에 과거의 기억으로 인도하는 무형적 장치로써 음악만 한 게 있을까? 바쁜 일상 속, 가끔은 과거 애정하던 음악으로 나만을 위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 표지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