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프를 못 가니 밴쿠버에서라도 옥색을 찾겠다는 의지
안 덥고 안 습한 환상적인 날씨가 계속되고 코로나 확진 케이스는 날이 갈수록 줄었던 밴쿠버의 여름. 하지만 여전히 주 간 여행은 금지되어 있었다. 캐나다에 오기 전부터 꿈꿨던 록키산맥과 밴프 여행은 내가 있던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서 알버타 주로 이동해야 했기에 가기가 어렵게 됐다. 캐나다까지 와서 록키를 못 가다니 마음이 쓰렸다.
그래서 어떻게든 BC주 내에서 놀아보자고, 하우스메이트들과 렌트를 해서 놀러 갈 계획을 세웠다. 다들 캐나다스러운 곳, 대자연에 목말라있었지만 코로나 때문에 아예 문을 닫은 곳이 많아(BC의 밴프라는 조프리 레이크도 내가 있던 기간 내내 문을 열지 않았다.) 선택지가 그렇게 많진 않았다. 고심하다 가리발디 산에 가기로 했다. 물론 가리발디 산 역시 코로나 때문에 등반객의 수를 제한하고 있어서 가려는 그날 새벽 6시에 열리는 주차장 자리를 예약해야만 갈 수 있었다. 일단 차는 미리 렌트를 해두고 당일 아침 네 명이 모두 주차장 티켓팅에 도전하기로 했다. 넷 다 자리 못 잡으면 가리발디랑 비슷한 방향에 있는 휘슬러나 가지 뭐, 하면서.
그래서 우린 다음날 휘슬러로 떠났다.
네 명이 전부 티켓팅을 실패했던 것이다. 하기야 나같이 평소에 산을 쳐다도 안 보는 애도 갈 데 없어 등산을 하기로 했을 지경인데 산이며 캠핑 좋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몰렸을 거야... 어이없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내겐 잘 된 일이었다. 난 등산화도 없는데 알고 보니 가리발디 산이 초보자가 그렇게 만만하게 갈만한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울면서 올라가서 울면서 내려올 뻔했다.
아무튼, 그렇게 얼렁뚱땅 휘슬러 여행이 결정되었고 가는 김에 몇몇 호수에도 들러 풍경을 구경하기로 했다. 다들 코로나 때문에 일이나 겨우 하고 집에만 있으면서 캐나다 하면 떠오르는 옥색 호수는 구경도 못 해봤기 때문이었는데, 그때부터였던가요. 호수 같은 것만 보이면 "옥색!!"하고 소리치는 옥색광인들이 나타난 것이.
휘슬러로 가는 길, 창 밖으로 보이는 대충 옥색인 호수도 나름 예뻐 보였고 휘슬러에 도착해서 밥을 먹고 오륜기 앞에서 사진 한 방 찍고 둘러보는 길에 발견한 개천 같은 것도 옥색이라고 그 앞에서 인증샷을 찍었다. 셀카 사진에 다들 너무 행복해 보여서 다시 봐도 웃음이 난다.
약간 아쉬운 옥색이었지만 다음 목적지로 정해둔 호수 두 곳은 찐 옥색이길 바라며 다시 차에 올랐다.
다음 목적지까지는 꽤 가야 해서 노래를 틀고 신나게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조수석에 탄 친구가 옥색!!! 하고 비명같이 외쳐서 정말 급하게 멈춰 섰더니 이런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이 호수, Green Lake는 제법 넓었고 제법 옥색이었다. 찐옥색이라기엔 부족했지만 우리가 지금껏 본 것은 휘슬러 개천뿐이어서 다들 신이 나서 사진을 찍었다. 휘슬러에 가는 동안에만 해도 우중충하던 날씨도 예쁘게 개서 호수가 아주 반짝거렸다.
다음 목적지는 더 옥색일까? 이젠 모든 관심사는 옥색이었다. 과연 옥색 호수 일지, 얼마나 더 옥색에 가까울지. 눈에 불을 켜고 옥색을 찾던 옥모 씨뿐 아니라 모두가 옥색 염불을 외며 다음 호수로 향했다.
사실, 두 번째 목적지는 릴루엣 호수(Lillooet lake)였는데 가는 길이 꽤 험난했다. 제일 저렴한 경차를 빌렸는데 들어선 길이 오프로드였다. 앞 뒤로 SUV와 트럭을 끼고 나름 힘을 내서 덜덜 거려보았지만, 이러다 차가 망가질 것 같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졌지만 잘 싸웠다... 우리끼리라도 명예 오프로드 카로 불러주기로 하며 마지막 목적지, 더피 호수(Duffey Lake)로 향했다.
지도를 대충 봐서 이렇게까지 먼 곳인지 몰랐는데, 더피 레이크는 밴쿠버와 캠룹스의 중간쯤 되는 지점이었다. 두세 시간 정도 산속을 달렸다. 운전하는 친구가 고생을 많이 했지만, 나는 뒤에서 산 구경을 하며 즐거웠다. 중간중간 혹시라도 곰이 나올까 봐 조금 맘 졸였고 인터넷은 물론 전화도 안 터지는 산길 한복판에서 차가 퍼질까 봐 조금 걱정하기도 했지만 별일은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더피 레이크, 옥색!!!!!!
사실 우리가 원한 밴프의 에메랄드색은 아니었지만, 옥색이었다! 장장 200km를 달려온 보람이 있는 예쁘고 한적한 호수. 화장실도 편의시설도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산이며 나무, 호수를 바라만 보아도 좋은 곳이었다. 차갑고 깨끗한 물에 발을 담그고 놀다가 돗자리를 펴고 준비해온 간식을 먹었다. 이러려고 캐나다 왔지, 속으로 이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거대한 산속을 달리고 여러 호수를 들러 마음에 드는 곳에 자리를 펴고 간식을 까먹는 렌터카 여행.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때의 나에겐 정말 드물고 귀한 여행이었다.
막판에 길을 잘 못 들어 10분쯤 돌아갔는데 그 덕분에 이렇게 예쁜 노을을 정면으로 보며 달렸다. 라이온스 게이트 브릿지를 건너며 보이는 다운타운의 높은 빌딩이 노을을 받아 오렌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실패에서 시작했지만 돌아올 때까지 완벽했던 여행. 이 여행 덕분에 돌아오기 전까지 하메들과 이곳저곳 놀러다닐 수 있었고 코로나 시대의 워홀이지만 좋은 여행과 기억들도 챙겨올 수 있었다.
그리고 덕분에 옥색의 무언가만 보면 혼자 웃는 사람이 되었다. 옥색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