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창창한 날들 Apr 20. 2024

일요일 저녁, 무전으로

무로 채 썰어 전을 만들어 보았다


유튜브 요리 먹방을 혐오한 적이 있었다. 쾌락을 심하게 추구하는 시대 분위기에 대한 저항일까.

그래서인지 요리를 소재로 글을 쓰지 않는다.(요리 에세이를 맛깔나게 쓰시는 작가님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어릴 적부터 식탐이 있던 내가 요리에 대한 추억도 많지 않다.

나란 사람은 과거의 어떤 감각을 동원해 추억을 꺼내올 수 있을까 답답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어제와 오늘 있었던 일만도 쓰고 싶은 것 투성이라서 추억의 창고를 뒤져야 할 절실함이 없어서일까.


여행을 가도 맛집 검색은 뒷전이다.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있을까.

밝고 따뜻하고 깨끗한 카페가 있을까.

그런 것이 궁금할 뿐.

강이 있으면 좋고, 바다가 있으면 더 좋은, 내가 바라는 여행지는 자연이거나 자연 가까운 곳이다.


그래도 가끔씩 요즘 해 먹는 음식 이야기는 써 보자 생각을 하게 되었다. 먹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까 일부만이라도 기록하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이를테면 지난 3월부터 주식을 채소과일식으로 바꾸었다는 이야기라든가. (냉장고에는 채소와 과일 외엔 밑반찬도, 다른 재료도 별로 없다.)

그래서 남기는 무전 이야기다.


일요일 오후에 도서관에서 걸어오는 길, 저녁 메뉴를 생각하다가 아침에 냉장고 안에서 본 상해 가는 무가 생각났다.

그래 무전이다! 몇 달 전 친구가 무전을 꼭 먹어보라고 추천했는데 이제야 시도해 보기로 하였다.


집에 돌아오자 걸어온 노곤함 때문에 눕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무시하고 무를 꺼냈다.

음, 더 놔두면 맛이 가버릴 상태로 보였다. 겉면을 1센티미터씩 잘라내 버린 다음 채를 치기 시작했다.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 채를 잘 치지 못하는 손이라서 얇게 저민 무 대여섯 장씩 살살 밀어서 차근차근 썰었다.

다행히 무에 물기가 많아 남아 채가 잘 쳐졌다. 손목 힘을 덜 주어도 되니까 신났다.


요리 유튜버처럼 과정을 사진 찍어 보기로 하였다.


순서

1. 무를 채 썬다.

2. 소금 한 꼬집, 뉴슈가 조금(엄마 암 투병 시기에 설탕 안에 들어있는 암세포가 좋아하는 성분이 뉴슈가엔 없다는 정보를 읽은 뒤로 설탕을 들이지 않는다) 넣는다.

3. 10분 동안 무의 숨을 죽인다.

4. 4분 동인 채에 무를 넣고 물기를 뺀다. 

5. 무에 부침가루, 튀김가루(전분 가능)를 넣고 버무린다.

6. 청양고추를 넣는다.

7. 처음엔 식용유, 뒤집은 뒤엔 들기름을 두르고 노릇노릇하게 부친다.

8. 기대와 다르더라도 수고한 나를 치하하며 맛나게 먹는다.


배추전을 좋아하지만 무로 전을 만들어 먹기는 처음이다.

한 입을 먹자 사각거리면서도 부드럽고 촉촉한 식감에 마음이 녹아내린다.

일요일 저녁 느낌을 풍성하게 하고 싶어, 보드카로 하이볼을 만들어 곁들인다. 


오빠가 아버지를 돌보고 있을 일요일 저녁, 가까이 있다면 이 무전을 내놓고 싶다.

아버지와 오빠가 맛있다고 할 맛이다. 틀림없이.


다 먹고 상을 치운 지금도 혀 끝에 들기름이 남아 있다.

나의 저녁 식사는 무와 청양고추와 들기름과 하이볼 덕분에 상당히 풍요로웠노라고, 늘 내게 밥을 먹었는지 물어주는 친구들에게 답해 주고 싶다.

"다음에 놀러 오면 무전 지져 줄게."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이제 그와 대적하지 않아도 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