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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Jun 13. 2024

다정과 제주 여행 2

제주 게스트하우스 여행 2




우리가 머문 게스트하우스는 대부분 외국인 숙박객이 머물렀다.

내가 비용을 최소화한 여행을 하자고 하니 다정이가 열심히 찾아준 곳이었다. 가격이 무지무지 싼데 퍽 깔끔했고, 조식도 주고, 넓은 거실에, 바다가 보이는 주차장 마당이 훤칠하며, 무엇보다 거실에서도 바다가 한눈에 펼쳐지는 곳이었다.

"그런데 외국인 숙박객이 대부분이래. 괜찮아?"

비록 영어는 못하지만 재밌을 것 같았다.

영어 실력은 중학생보다 못하다. 대학도 영어, 수학 점수는 낙제를 겨우 면해서 순전히 국어와 지리 실력으로 들어갔다. 대학 1학년 때 LAP영어 수업 이후로 영어와 담을 쌓고 산 지 어언 삼십 년. 영어를 쓰던 사람도 안 쓰면 말하기 쉽지 않다는데 영어를 사용할 일이 없던 나 같은 사람이라면 오죽할까.


반면 다정이는 미국에서 유학했고, 수능영어를 가르치는 영어선생님인 데다, 매주 외국인과 1대 1 대화를 나누는 공부를 꾸준히 하는 찐 영어 가능자이다.

그러니 무슨 걱정이랴. 나에겐 영어 잘하는 다정한 다정이가 있다!

게다가 거의 싸돌아다니느라 숙소에서 머물 일이 별로 없을 터였다. 소통할 일이 뭐 그리 많을까. 손님을 아예 못 만날 수도 있잖아.  


게스트하우스에 입소한 날, 너무 늦게까지 놀다가 밤 10시 반이 넘어 들어갔다. 들어가니 호스트가 밤 11시가 취침 시각이니 조용히 잠 잘 준비를 하라고 안내했다. 거실이 깜깜했다.

여성용 8인실은 이층 침대가 나란히 두 개씩 준비돼 있었다. 우리는 공중목욕탕가서 씻고 각자의 침상으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침대에 누우며 맞은편의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  다정한 눈빛과 미소로 인사하였다. 달빛이 은은하게 방 한가운데를 비추었다. 두 여성의 인상이 좋았다.


다음날 아침!

7시에 일어났다. 게하 전체가 고요했다. 세수한 뒤 거실에 앉아 호젓하게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2층에서 내려다 보이는 푸른 바다 앞에 있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내가 지금 남방큰돌고래를 볼 수 있는 제주에 와 있단 말이지! 그리고 이곳은 세계 여러 나라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란 말이지!


30분쯤 지나니 남자방 문이 열렸다. 훤칠한 젊은 남성이 회갈색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방에서 나왔다. 그는 당황한 듯 목례를 하고 목욕탕이 있는 복도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의 등을 향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하이'라고 했다. 마음속으로 '헬로'라고 해야 예의 바른 건가, 하면서 아무튼 때를 놓쳐서 아쉬웠다. 다음엔 헬로라고 해야지.


조금 뒤에 또 인기척이 나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젯밤 인사를 나눈 고동색 피부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내 맞은편 침상 머무르는 캐나다인이었다. (나중에 이름이 린다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발음이 정확한 한국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서 나도 활짝 웃으며 답했다.

"한국어 배우셨나 봐요? 발음이 정확하시네요."

"네···."

그녀가 다가오며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갈색 머리의 여성이 나타났다. 그녀는 프랑스인이었는데 린다에게 무언가를 물었다. 린다는 그녀와 뭐라고 뭐라고 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의 말을 더 듣지 못해 아쉬웠다.


다정이가 씻는 동안 나는 우리 둘이 먹을 조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게하의 공식 메뉴는 시리얼, 잼과 식빵, 커피와 우유, 주스였다. 집에서 가져온 오이 두 개를 먹기 좋게 썰어서 한 접시 내놓았다.

프론트에 있는 시리얼을 그릇에 담으려고 다이얼을 돌리는데 시리얼과 함께 뚜껑이 떨어졌다. 물건이 파손된 줄 알고 당황한 나는 얼른 제자리에 붙였다. 두 번째 그릇에 시리얼을 담는데도 그게 또 떨어졌다. 거실 한쪽의 빈백 소파에 앉아 있던 훤칠남이 다가오며 손짓으로 알려주었다. 그제야 그것이 잠금장치라는 걸 알았다. 나는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했다.

"땡큐."

그는 미소 짓고는 목욕탕 쪽으로 사라졌다. 아, 만찢남이 저런 얼굴이겠구나. 그를 오래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내가 너무 작게 느껴져서.


남녀 외국인들이 한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자타칭 파워E인 내가 말을 하지 못하다니. 내 안에선 별별 질문이 마구 샘솟는데 입은 안 벌어지는 조개가 된 듯하였다.

내향형인 다정이가 영어로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하는 반면 나는 눈 하나만 보인 채 숨어 있는 고양이처럼 굴었다. 내 앞에는 다정이라는 집사를 내세운 것마냥.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고 사람들에게 호기심이 많은 나를 배려해 다정이가 같은 방을 쓰는 여성들에게 타로를 해 주면 어떻겠느냐 살짝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둘이 하려고 가져온 건데 뭘..."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 때 타로를 해 준다고 하면 대부분 반긴다. 언젠가는 연인과 헤어지고 퇴사하여 여행 중이라는 우울한 삼십 대 남성에게 타로를 봐 주고 밥도 얻어 먹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말이 안 나오는데 어떻게 타로 해설을 한단 말인가. 미묘한 뉘앙스를 표현하기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외국에 던져진 것 같은 기분으로 방에 들어오니 젊은 여성들은 눈인사를 하고 먼저 게하를 나갔다. 하나같이 어쩜 그렇게 선한 인상들인지.

나는 그들과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지만 입이 터지지 않는 상황이 난감하기만 했다. 일본 여행 가서 번역기로 아무한테나 말 걸던 그 창창 어디 갔지?

다정이가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 봐서 일단은 그냥 웃었다. 공연히 친구를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하면 안되니까.




거실에서 보이는 바다 풍경

지느러미로 알 수 있는 돌고래들의 이름

거실과 프론트. 남자 숙소.(오른쪽)

거실에서 보이는 밤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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