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은 삼십육 년 지기 친구이다.
다정의 퇴사 시기를 기다려 둘만의 제주도 여행을 가기로 했다.
값싸고 좋은 숙소를 찾는 나를 위해 다정이 게스트하우스와 렌터카를 예약했다. 하루 2만 원인 숙소비, 3일 동안 렌터카비 7만 원이라는 믿을 수 없는 비용을 치르면 되어서 신났다.
문제는 결정적인 비행기 티켓이 시시각각 오르더니 1인당 왕복 16만 원이나 들어서 속상했다. 하필 비행기 표는 내가 구하기로 한 것이었는데 비싼 데다 떠나는 날 새벽 6시, 돌아오는 날 가장 늦은 비행기로 예매하는 바람에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어중간했다. 그래서 하루 일찍 만나 김포의 호텔에서 자고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해프닝을 겪어야 했다. 아이고야 나는 일처리도 왜 그렇게 야무지게 하질 못하는지.
"먹는 건 너 신경 쓰지 않게 해 줄게. 채소과일식으로다가."
우리 둘은 식성이 다행스럽게도 잘 맞는다. 비슷하게 변해가고 있다고 하는 말이 맞겠다.
전날 밤 보드라운 행주에 과도를 돌돌 감아 캐리어 깊숙이에 집어넣었다. 냉장고에 남은 오이를 그 옆에 넣으면서 아침으로 당근, 오이, 상추 등 내가 먹던 것들로 먹으면 다정도 좋아할 거야, 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숙소와 렌터카 예약까지 며칠 동안 야무지게 알아보고 수고해 준 다정에게 고마워서 나는 식사만큼은 내가 책임지리라 마음먹었다.
보안검색대를 지날 때였다.
"가방 안에 칼이 있네요."
나는 '칼'이란 말에 놀랐다. 내가 집어넣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저는 흉기나 무기를 넣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는 표정으로 직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검색대를 먼저 통과한 다정이 나를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였다. 어리둥절했던 나는 한참 만에야 과도를 생각해 냈다.
"아, 생각났어요. 과일을 깎아 먹으려고 넣었네요."
"1층에 내려가셔서 수하물로 부치든지 여기서 버리셔야 해요."
신혼 때부터 쓰던 정말로 오래된 과도였다. 나는 과감하고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냥 버려 주세요."
다정과 나란히 탑승구 쪽으로 걸어가면서 우리는 빙그레 웃었다.
"우리 덤 앤 더머 같다. 미안해. 일을 자꾸 꼬이게 만드네."
덤 앤 더머라고 말한 까닭은 그전부터 소소한 몇 가지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창 덕분에 계속 웃게 돼서 재밌는걸."
애증이 덕지덕지 붙은, 잘 들지도 않는 과도를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순간이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