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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창한 날들 Jun 19. 2024

목소리가 또 안 나와

실음 2탄




고 1 음악 시험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그날 이후.

나는 어디에서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였다.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 거리의 노래인 민중가요를 불러야 했기 때문이다.

3월의 어느 날, 강의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교정에서 등록금 동결 투쟁 집회가 있었다. 끄트머리에 앉아 무슨 내용인가 듣다가 결국 그날 저녁까지 남았고, 총장실 점거 농성장까지 따라 들어갔다. 우리 단대 학생회는 삭발하고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총학생회장을 배출하였다. 나에겐 회장 언니가 잔다르크처럼 보였다.  


어린 스무 살 창창은 비장한 마음으로 가방에 넣고 다니던 일기장에 편지를 썼다. 부모님과 늘 나의 등대였던 고 1 때의 담임선생께.

'비겁하게 도망가진 않겠어요.'

그리고 선배들을 따라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목이 터져라 불렀다.


https://youtu.be/kilx2jCtpdI?si=ENOyg7wFYuK7LFxn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말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를 못 부를까 봐 겁나는 내가 사라졌다. 우리의 목소리를 모아야 했으므로.

완삭 한 머리로 해맑게 웃는 4학년 선배에 대한 의리와 달동네 공부방 활동 등 작은 존재들을 위해 연대하는 선배들의 선의에 감동한 나는 그렇게 학생운동권에 입문했고 목소리를 찾았다.


그 뒤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학과 방 바깥은 비가 오고 있었다.

방학에 생일인 친구 Y를 위해 과 친구들 여덟이 모였다. 우리는 테이프에 노래와 축하 메시지를 녹음하고 있었다. 우리가 선곡한 노래는 '내가 찾는 아이'였다.

친구를 위해 모두가 한 목소리로 부르며 '내가 찾는 아이' 중 나도 하나라는 소속감과 연대감을 느꼈다.


https://youtu.be/7KmO7XAPPMA?si=8aGb7Cpaz_PtyLA6


내가 찾는 아이 흔히 볼 수 없지
넓은 세상 볼 줄 알고 작은 풀잎 사랑하는

워워 흔히 없지 예예 볼 수 없지

내가 찾는 아이 흔히 볼 수 없어
내일 일은 잘 모르고 오늘만을 사랑하는

워워 흔히 없지 예예 볼 수 없지

내가 찾는 아이 흔히 볼 수 없지
내 마음이 맑을 때나 얼핏 꿈에 볼 수 있는

워워 흔히 없지 예예 볼 수 없지

내가 찾는 아이 흔히 볼 수 없지
미운 사람 손을 잡고 사랑 노래 불러주는

워워 흔히 없지 예예 볼 수 없지

내가 찾는 아이 흔히 볼 수 없지
빈 주머니 걱정돼도 사랑으로 채워주는

워워 흔히 없지 예예 볼 수 없지

내가 찾는 아이 매일 볼 수 있지
기역, 니은, 디귿, 리을

미음, 비읍, 창창, Y~~~

워워 볼 수 있지 예예 볼 수 있지

워워 모두 다지 예예 모두 다지

들국화 2집(1986년)



 

직장에서 회식으로 몇 번 노래방에 가 봤고, 아이와 애니메이션 주제곡이나 동요를 부르며  십 년 쯤 흐른 어느 날이었다.

시댁식구들과 노래방에 처음 가게 됐다. 가족 단위로 노래방 가는 일이 조금씩 유행이 될 때였던 것 같다.

손윗동서의 나이가 나보다 여섯인가, 일곱 적었다. 그때의 나는 위계질서를 중시해서 깍듯하게 형님이라고 불렀다.


시어머니가 산장의 여인을 성악가처럼 불렀다. X가 슬픈 인연을, 아주버님이 김경호의 금지된 사랑을 고음까지 완벽하게 가창하였다. X와는 민중가요를 부르며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맑은지, 고음을 무리 없이 잘 소화하는지 알고 있었는데, 식구들 전체가 노래를 잘하니까 점점 주눅이 들고 있었다.


그쪽 유전자는 그렇다고 치고.  

마침내 동서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녀는 '무인도'를 선택했다! '파도여 슬퍼말아라'로 유명한 그 노래였다. 뜻밖이었다.

드라마틱한 전주가 흘러나오자 나보다 나이 어린 그녀, 왕년의 김추자라는 별명이 있었다던 그녀는 1976년에 발매된 노래 무인도를 부르기 시작했다.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 노래다. 키도 나보다 머리 하나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져서 남편과 매일 대련한다는 만능스포츠 선수처럼 생긴 그녀는 묵직한 소리통을 가진 여자였다.


솟아라 태양아 어둠을 헤치고 찬란한 고독을 노래하라.

빛나라 별들아 깜깜한 밤에도 영원한 침묵을 비춰다오.      


https://www.youtube.com/watch?v=1XQi847OrYM&pp=ygUZ7YyM64-E7JesIOyKrO2NvOunkOyVhOudvA%3D%3D



동서의 가창력과 당당함 나는 압도당하고 말았다. 가수라 해도 믿겠고 그 이상이었다.

아주버님 알고 있었다는 듯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고, 시어머니와 X, 나는 홀린 듯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시어머니와 X의 극찬이 이어졌다. 

시아버지는 돈을 대 주는 존재로서 점잖을 빼고 정가운데 꼼짝도 않고 있었는데, 아주 오랜 시간 뒤에 알고 보니 엄청난 음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서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됐고, 나는 결혼을 일찍 한 데다 시어른과 몇 년 함께 산 인연으로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때였다.

동서는 나보다 학력이 낮았고 대화를 즐기는 시댁 분위기에 안착하지 못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형식적으로는 형님이라고 대우를 했지만 은근히 동서를 무시했던 것 같다.


시댁에 두 형제네가 모여 밥 먹은 뒤 다과를 놓고 대화할 때가 되면 동서는 겉돌다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우리 부부와 시어머니는 가족 모임에 들어오지 못하는 데다 비밀이 많은 동서가 불편했고, 형님네가 집안일을 이끌어주지 못한다는 불만도 있다. 시어머니도 동서에 대한 불을 나한테 자주 털어놓곤 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시어머니도, 내 남편도 완전히 동서의 편이었다.


동서가 대차게 파도여 슬퍼말아라, 첫 소절을 불렀을 때 나는 패배를 인정했다. 고음이 전혀 올라가지 않는 나 자신을 알고 있었으니까. 노래를 취소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들 나를 향해 박수를 치며 노래하라고 했다. 눈치 없는 남편이 내 등을 토닥였다. 나는 마이크를 건네받고 엉거주춤하게 일어다.


어떤 노래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4, 3, 2, 1

첫 소절부터 놓치자 허둥대던 나의 목소리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또!

한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한 손으로는 목을 부여잡은 채 꺽꺽거렸다. X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눈물이 찔끔 흘렀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당황스러울 만큼 머리가 안 돌 때, 약이 오르고 억울할 때 눈물이 난다. 남편이 그제야 눈치를 채고 마이크를 잡았다.

"이 사람 감기 걸렸어요. 목이 안 좋은 것 같아요. 제가 대신 부를게요."

그날의 무대는 남편의 목소리로 막을 내렸다.


그 뒤 오 년 정도는 노래방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집에서도 노래를 부를 일을 만들지 않았다. 클래식 리스너로만 남기로 했다. 덕분에 나는 꽤 클래식과 친해졌다. 고통스러운 일은 나쁜 흔적뿐 아니라 반드시 좋은 길도 열어준다.


목소리를 잠시 잃었던 두 번째 경험에 대한 이야기였다. 믿을 수 없겠지만 진실이다. 남의 재능을 탐하고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은 결과는 음치 정도가 아니라 목소리를 빼앗기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 뒤로 나는 어찌어찌 목소리를 되찾았고, 깨방정 끼발랄로 노래를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치 않다는 걸 알았으니까. 파묘의 이화림이 하는 굿 저리 가라로 방방 뛰고, 바닥에 구르기를 불사한다. '우리의 꿈(만화 원피스 주제곡)'을 최애창곡으로 부르는 창창이 되었다.


내 어린 시절 우연히 들었던 믿지 못할 한 마디

이 세상을 다 준다는 매혹적인 얘기

내게 꿈을 심어 주었어 - 우리의 꿈, 코요테




이번 글의 커버 사진은 최근에 노래방 앱으로 부른 아이유의 노래 'Love wins all' 결과 사진이다. 다시 노래를 부르게 됐다는 해피엔딩을 미리 알려드리기 위함이다. 요즘 나는 방구석 노래방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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