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만 원 떼먹고도 '당당'…빈손으로 울며 귀국
시간상으로는 가장 먼저 다녀왔고
이주노동자 특집 리포트 중에는 마지막 편이었던
이천의 한 채소농장 사례.
찍으며 가장 열불이 터졌고
고용주의 뻔뻔함에 치가 떨렸던 날이었다.
이주노동자를 위한 노동인권상담센터인 '지구인의 정류장'에서 인권활동가 두 분과
이주노동자 한 분을 태워 현장으로 향했다.
이주 노동자와 관련된 여러 사건을 맡아오신 변호사 한 분도 따로 현장으로 오기로 했다.
(현장 취재에 있어 이 분이 아주 천군만마였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농장주와의 최근 갈등에서 농장주는 분에 못이겨
그녀의 방 문을 망치로 부쉈다고 했다.
(이후 농장주와의 대화에서 그는 다툼 중 그녀가 직접 본인의 방 문을 부쉈다고 했는데
둘 중 누구의 말도 증거는 없으니 누가 부쉈는지에 대해 확정적으로 말하지는 않겠다)
그 이후 그녀는 도망쳐 나와 지구인의 정류장의 도움으로 피신 해 있었고
이 날 그녀는 기숙사에 남은 본인의 짐을 챙길겸 우리와 동행 한 것이었다.
이주노동자는 이동하는 차에서 내내 공포에 떨었고
현장에 도착해 내려서는 본인이 지내던 기숙사로 들어가는 것 조차 무서워했다.
도착한 현장에 그러나 농장주는 없었고
그녀는 활동가와 함께 본인의 방에 들어가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챙겼다.
함께 들어가 그 모습을 찍었다.
본인의 방에서 본인의 짐을 챙기는 것 마저 두려워
서둘러 짐을 챙기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방은 물론 열악했다.
군데군데 곰팡이가 피어있었고 장판은 뜯어져있었다.
난방이 안돼 딱 한 몸 뉘일 만한 전기장판이 그녀가 몸을 대고 앉거나 누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5년여를 생활한 방이었지만 그녀가 가지고 떠날 짐은
20인치 정도 돼보이는 캐리어 하나가 전부였다.
짐을 꾸려 밖으로 나와 전반적인 농장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이후 좀 더 기다리니 멀리서 흰 승용차가 이쪽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저 차라고 알려주고는 비닐하우스 안으로 숨어 손만 꼼지락거렸다.
도착한 농장주는 우리를 보고 놀란 기색 하나 없었다.
보통 '나쁜놈'들은 내가 들고 다니는 ENG카메라를 보면 좀 당황하거나 쫄기 마련인데
그런게 없었다.
그가 다소 폭력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농장주가 우리의 취재에 반발해
충돌 상황이 생길 것을 우려했었다. 때문에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나는 작은 핸디캠 하나를
오디오맨에게 주며 나와 취재기자가 농장주와 대화하는 동안 우리 모두가 나오게끔
풀샷을 찍고 있어달라 요청해놓은 상태였는데,
그는 도착해서부터 우리가 떠날 때까지
왜 카메라를 들고있냐거나 찍지말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취재과정에서 불필요한 갈등을 줄여 편하기야 편했지만
그 뻔뻔함과 당당함이 경악스러웠다.
그는 대화 처음부터 임금을 수 년 간 체불한 사실은 인정했다.
체불한 기간에 대해서도 동행한 인권활동가, 변호사의 계산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기간을 최저임금으로 계산해 총 체불된 임금의 액수를 이야기하자 그는 처음으로 놀랐다.
수 년의 기간이었으니 당연히 수 천 만원의 액수였다.
그는 무슨 말도 안되는 이야기냐며
자기가 여지껏 노동자한테
밥도 사주고 반찬도 사주고
어디 나간다고 하면 운전도 해주고
해주고, 해주고, 해주고 …
떼먹은 임금을 물었는데, 그는 사줬던 밥과 반찬을 늘어놨다.
그러니까, 그의 입장은 이랬다.
임금?
못 준 거 인정한다.
그 액수는 정확히 따져봐야겠지만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런데?
내가 지금 돈이 없다. 야채값이 똥값이다. 내가 돈 생기면 준다지 않냐.
더이상 내가 뭘 어떻게 해줄까?
내가 한국은행이라도 털어서 주랴?
(마지막 문장까지 실제로 한 말이다)
그는 이전에도 한 이주 노동자에게 임금을 체불했던 전과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 당시 그는 노동자에게 체불된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차라리 벌금을 물었다.
그 편이 훨씬 '쌌다'.
그런 전력이 있어도 새로이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는데에는
그 어떤 걸림돌도 없었다.
새로운 노동자를 신청했고, 허가받고, 고용했다.
이 날 우리의 취재 이후 16시경 농장주와 노동자, 활동가와 변호사는
함께 경찰조사를 받기로 돼있었다.
임금 체불에 대해서는 차후에 조사할 예정이었고
일단은 신고가 들어간 기숙사 문 파손 사건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조사 시간도 있고 하니 취재를 마무리 짓고
각자 차에 올랐다.
차에 오르며 장비를 싣는 동안 농장주는 우리 차 옆에 멀뚱히 서서
우리를 배웅했다.
하마터면, 안녕히계세요, 인사할 뻔 했다.
안녕히 지내면 안되지 참.
나와 취재기자, 오디오맨은 회사 차에 올랐고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저리 당당할 일인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다.
부들부들.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주노동자가 뉴스에 본인의 얼굴이 나가기를
극도로 꺼리는 이유는 사실 고용주의 위협보다 더 큰 것이 있다.
바로 혹여나 고국에서 부모님이 뉴스 영상으로 본인의 모습을
보게될까 싶어서이다.
"엄마는 (이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다 이 취재 날 이후 일이 쉽사리 해결될 것 같지 않던 그녀는 결국
고향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녀도, 어머니도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녀는 머지않아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꿈을 안고 날아온 나라에서
그녀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느끼고
돌아가게 되는걸까.
정작 그는
여전히 뻔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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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news.imbc.com/replay/2020/nwdesk/article/5716797_3252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