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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여 Jun 07. 2022

요가 원데이 클래스로 불안 잠재우기

살면서 요가를 접할 기회는 많았다. 대학교 방학 때나 회사를 쉴 적에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요가 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일을 하면서는 요가 페스티벌을 직접 기획해 운영한 적도 있고. 하지만 나와 요가의 거리는 행성과 위성처럼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요가를 통해 몸과 마음을 수련할 수 있다는 요가인들의 말은 신비롭지만 공감하긴 어려웠고, 부러웠지만 학원을 다닐 만큼의 의욕을 가져다 주진 못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PT와 필라테스를 꽤 오래 했다. 근력이 부족하고 타고난 체형 때문에 보완할 점이 많았다. 1:1로 선생님과 소통하며 내 몸에 맞춰 운동할 수 있다는 게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돈을 내고 받는 강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학교에 가는 아이처럼 수동적으로 변했다. 일주일에 한 번 수업만 겨우 나갈 뿐 자발적인 노력은 하지 않았다. 결국 권태가 찾아왔고 재등록은 하지 않았다.


그즈음 나는 개인적인 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일을 그렇게 처리한 스스로가 한심스러웠고 자유롭게 소통할  없는 상황이 답답했다. 그리고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며 불안해 했다. 주변 사람들은 별일 아니라고 했지만  마음은 쉽게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농구장에서 우리 팀이 골을 넣는 순간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도중에, 새벽에 목이 말라 잠에서 깼을 때도 불안은 슬그머니 고개를 드밀어 속을 뒤집었다.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하다고 해야 할까. 이때 급격히 가까워진 친구가 있었다. 첫 회사 동기였는데 막상 그때는 부서도 다르고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전 국민에 불어닥친 mbti 유행 덕분에 친구와 내 mbti가 똑같다는 것, 이전에 다른 동기가 우리 둘의 결이 비슷하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는 것, 이 친구와 남편이 초중학교 동창이고 짝꿍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친구는 요가 선생님으로 진로를 바꿔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운동을 관둬서 몸이 근질근질하기도 했지만 요가를 통해 이 시끄러운 마음을 잠재울 여지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친구의 추천으로 요가 원데이 클래스를 듣기로 했다.


수업 당일, 남편이 요가원 근처로 데려다주었다. 차에서 내려 골목 안으로 쭉 들어가자 3층짜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출구를 못 찾아 몇 발자국 헤매다 원목에 쓰인 요가원 이름을 확인했다. 좁은 계단을 올라 3층에 다 다르자 인센스 향이 가장 먼저 코 끝에 닿아 환영 인사를 건넸다.


쭈뼛거리며 들어서자 선생님께서 환한 미소로 맞아주셨다. 비록 얼굴은 마스크에 가려져 있었지만 동그랗고 큰 두 눈으로 나를 바라봐주시는 모습에 긴장이 사르르 녹았다. 수업을 하는 공간도 아늑하고 포근했다. 왼쪽의 전면 창은 활짝 열려 있었는데 수업 내내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 들어와 몸을 감쌌다. 새들이 지저귐이 계속 들려와 여기가 서울 한복판인가 싶었지만 곧이어 지나가는 오토바이의 소음과 누군가 침을 뱉는 소리가 들려오며 현실을 깨우쳐 주었다. 하지만 그런 자연스러움이 좋았다.


내가 수강한 '인요가' 클래스는 긴 시간 동안 한 가지 동작을 유지하며 고요하게 머무르고 호흡에 집중하는 수업이다. 주로 스트레칭을 하듯 근육을 이완시켜주는 동작이 많았는데 등과 무릎, 허벅지에 통증이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불 앞에서 서 있을 때와 같이 열기가 느껴졌다. PT나 필라테스 수업이었다면 바로 선생님께 아프다고 이렇게 하는 게 맞냐고 징징댔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속에서 울려 퍼지는 말들의 음향은 줄이고 팔과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는데만 집중했다. 그러자 통증도, 달군 쇠붙이같이 날 괴롭히던 단어들이 점점 누그러졌다.


수업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바로 선생님께서 중간중간해주시는 말씀들이었다. 우리가 밖으로 찾아 헤매는 기쁨이나 평화 같은 것들은 이미 우리 내면에 있다고 했다. 다만 아직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을 뿐이라고. 그러니 길가에 핀 붉은 장미꽃이나 기분 좋게 뺨을 간지럽히는 바람처럼 충만함을 발견해보고, 어떤 장소에 가거나 누군가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라고 하셨다. 어딘가 대단한 곳으로 떠나지 않더라도 바로 주변에서 우리 스스로를 채울 충만함을 만날 수 있고,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서 더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뜻.


동작을 따라 하고 호흡에 집중하면서도 불안은 계속해서 내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나 여기 있어. 잊지 않았지?'라고 말을 건네면서. 그럴 때마다 나는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을 되새겼다.


우리의 몸은 하나의 공간이다. 빈 공간이기 때문에 기쁨과 즐거움, 편안함 등의 감정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거리가 먼 감정들도(부정적인) 올 수 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어떤 감정이던 우리가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천주교 신자고 신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주신다고 배웠다. 하지만 '감당'이라는 말은 쇠로 만든 추가 달린 듯 사뭇 무겁게 느껴진다.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날지는 몰라도 내가 마주한 일이 그토록 괴롭고 힘든 일임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맞이할 수 있다'라고 하셨다. 손님을 맞이하다, 새해를 맞이하다, 첫돌을 맞이하다 처럼 맞이하다는 말에는 기쁨이 묻어난다. 그리고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의 현재에 집중하는 말이다.


선생님의 말씀은 귓바퀴로 들어와  심장과 마주했다. ' 몸은   공간이며 기쁨이던 불안이던 언제든 찾아오고 떠날  있다. 나는 그것들을 기쁘게 맞이할  있다.' 생각이 들며 자신감이 피어올랐다.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후회와 불안이 점차 옅어지며 무겁던 가슴이 아주 많이 가벼워졌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씩 휘청거린다. 그때마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땅을 딛고선 발에 힘을 꽉 주고 마음의 중심을 다 잡는다.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집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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