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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여 Sep 23. 2022

염치없는 객식구

서울살이를 시작하며 원룸이라 불리는 작은 공간에 적응하고 사는 법을 배웠다. 짐은 최대한 줄이되 동시에 최대한 수납하는 법을 깨치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원룸 생활이 익숙해질 때쯤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투룸 빌라로 이사했다. 그곳에는 안방이 있고 거실과 옷방도 있었다. 이로써 나는 먹고 자고 입는 행위를 각자 다른 공간에서 할 수 있게 되었다.


공간이 넓어지며 우리 집을 드나드는 손님도 늘어났다. 이사 갈 무렵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 친구(지금의 남편), 서울 나들이를 좋아하는 엄마, 친한 친구들 등등. 그러던 어느 날 반가지 않은 손님이 나타났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말 한마디 없이 찾아와 내 집인 양 머물면 당황스러운 법이다. 심지어 그와 나는 혈연은 물론 학연, 지연 등 어떠한 고리로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관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종 연락도 없이 우리 집을 찾았다. 그가 방문하는 타이밍은 아주 절묘했는데 꼭 다른 손님이 떠나고 내가 홀로 있을 때만 모습을 드러냈다. 발걸음은 어찌나 조용한지 그가 집에 온 걸 뒤늦게 눈치챈 적도 많았다. 한참 TV나 스마트폰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묘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면 어김없이 그가 날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의 태도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현관문 근처에서 알짱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내가 지보다 덩치는 훨씬 크지만 한없이 유약한 인간이란 걸 알았는지 그는 과감하게 집 안을 활보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화장실에 난데없이 등장해 나를 기겁하게 만들더니 결국 거실까지 침범했다. 염치없는 객식구 같은 같으니.


후덥지근한 기운이 가득한 여름밤이었다. 침대에 누워 폰을 보고 있었는데 싸-한 느낌이 들었다. 왜 공포 영화에 자주 나오는 장면 있지 않은가. 나쁜 일이 생기기 전, 공기마저 멈춘 듯 정적이 머무는 순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있었다. 현관문에서 화장실로, 화장실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안방까지 세력을 확장한 채 내 앞에서 당당한 자태를 뽐내는 그가.


이때부터 나는 집에서 혼자 쉬다가도 집안 곳곳을 병적으로 살폈다. 때로는 그의 모습을 한 헛것도 봤다. 시간이 갈수록 증상은 심해져 외출을 하고 오면 현관문을 바로 열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나는 문 앞에서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그가 집에 있지 않길 간절히 바라면서.


분명 나 혼자 사는 집인데도 다른 이와 집을 공유하는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 결단을 내렸다. 그를 집에서 쫓아내고 내 삶에서 지워버리기로. 곧바로 전화 한 통을 걸었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며칠 내 전문가를 우리 집으로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나와 그의 이별을 도와줄 전문가 말이다.


프로페셔널은 달랐다. 빠르게 집안 구석구석을 수색하고 그를 잡아둘 장치를 설치했다. 전문가는 일정 시간 후 다시 방문하겠다고 했다. 전문가가 오기 전에 그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문가를 등에 업은 나는 이전과 달라졌다. 혹여나 그가 오더라도 나는 두 어깨를 쫙 펴고 그를 맞이할 준비가 됐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기는 내 집이야. 나가.'


그와 다시 대치하는 상황을 수십 번 시뮬레이션했건만 그는 전문가가 온 뒤로 자취를 완전히 감춰버렸다. 내 손톱 2개만 한 크기임에도 엄청난 존재감을 자랑하던 그와의 독대는 과거로 남았다. 앞으로도 만나지 말자.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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