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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일지] 1. 나 왔어, 아빠.

2019. 11. 20. 수. 너무 늦어버린 그날.

by 적정철학
애도 작업은 상실이 일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최초의 충격과 혼돈부터 기록함으로써
위험한 감정을 위험하지 않은 형태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잘 쓰거나 규칙적으로, 의무적으로 쓸 필요는 없다.
종이와 연필을 들고 내면의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써나가면 된다.


김형경,『좋은 이별』, (사랑풍경, 2012)

1. 나 왔어, 아빠.

2019. 11. 20. 수. 너무 늦어버린 그날.


가야지, 가야지. 계속 생각하고 마음을 쓰면서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아빠를 보러 가는 날을 미루고 또 미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아픈 아빠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프니까.

다 핑계, 다 거짓말.

그냥 내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어서 가기 싫었겠지.


11월 20일 수요일,

그날도 보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보러 가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아빠에게로 갔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데우지 않고 바로 먹을 수 있는 죽을 종류별로 10개 사서 들고 갔다.

그렇게라도, 조금이라도 내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었나 보다.


열쇠로 문을 열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빠, 나 왔어."

이상하게도 그날은 집안이 너무너무 컴컴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빠"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네. 불은 꺼놓고 있어도 TV를 켜서 보고 계실 시간인데...'

일찍 주무시나? 하는 생각을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불을 켜고 아빠를 봤다.


늘 계시던 그 자리에, 그대로 반듯하게 누워계셨다.

"아빠, 나 왔어."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눈을 뜨고 계셨지만 그 눈을 나를 바라보는 눈이 아니었다.

수도 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봤을 천장을 향해 있는 눈.

그렇게 아빠는 내 곁을 떠나갔다. 마지막 인사도 못 하고.


119에 신고를 하고, 언니에게 전화를 하고,

구급대원들이 오고, 경찰이 오고, 감식반이 오고, 또 가고.


장례식장 사람들이 와서 아빠를 집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너무나 깡말라 버린 아빠를.

이제는 좋아하는 술도 한 모금 못 마시는 아빠를.

컵라면을 먹을 수도, 식혜를 마실 수도,

TV를 보면서 웃을 수도, 채널을 돌릴 수도 없는 우리 아빠를

장례식장 사람들이 와서 집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뭐가 그렇게 쉬워요?"

"뭐가 그렇게 간단하죠?" 묻고 따지고 싶었다.

사람이... 사람이 죽었는데요.

그냥 사람이 아니고, 우리 아빠가, 우리 아빠가 죽었어요.

그렇게 묻기엔 아빠네 집 복도가 너무 추웠다.

발도 시리고, 손도 시렸다.


언젠가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글에서 누군가 이렇게 쓴 걸 본 기억이 있다.

'슬픔도, 아픔도 살아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거다.' (정확하진 않으나 내가 기억하는 내용이 그렇다.)

그 말이 문득 또 떠올랐다. 아빠는 이제 발도 안 시리겠지, 허리도 안 아프고, 배도 안 고프겠지.

왜냐하면... 아빠는 이제 살아 있지 않으니까. 아빠는 죽었으니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심했다.

죽음, 끝, 이런 단어를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나고 아득해지곤 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내가 죽는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한 번 태어나면 한 번 죽는 게 인생이라지만, 그건 너무나 명확한 진리지만


나는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너무 어려웠다.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 정말로? 정말로? 왜? 왜? 왜? 갑자기 왜?

이렇게 허망하게, 이렇게 허무하게, 이렇게 쉽게?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또 오겠다고 했는데, 나를 안 기다리고?

내가 사다 놓은 식혜도, 박카스도, 두유도 하나도 안 드셨는데?

이제 집에 가도 아빠가 없다고? 왜? 왜? 왜?


아빠, 나 왔다니까. 아빠 보러 왔다고.

근데 왜 누워만 있어? 왜 대답도 안 해? 물 줄까? 술 줄까? 뭐든 말만 하면 줄게.

내가 너무 늦어서 화난 거야? 바쁘다고, 힘들다고 자주 안 보러 와서 화났구나? 그랬구나?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아빠, 많이 무서웠지?

혼자서, 컴컴한 곳에서... 아프고 힘들었지?

미안해. 아빠.

내가 손도 더 꼭 잡아주고, 아빠 마음도 잘 헤아려주고,

더 자주 찾아보고 했어야 했는데. 이기적인 딸, 이해하고 용서해 줘...

나도 갑자기 사라져 버린 아빠, 용서하려고 노력해 볼게.


뭐가 맞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어.

내 잘못일까 하는 생각에 슬프다가도

사람 죽고 사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다가. 이랬다 저랬다...


11월 20일 수요일.

너무 늦어버린 그날.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나에게 영원한 숙제로 남긴 그날.

아빠는 제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아직 제 마음에서 아빠를 떠나보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앞으로, 제가 이 세상에서 사는 날 동안 아빠를 떠나보내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애도 일지를 기록하면서 아빠하고 저하고 제 마음속에서 행복하게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습니다.

슬프게, 아프게, 힘들게 붙잡고 있는 게 아니라

기쁘게, 행복하게, 웃으면서 함께 일상을 살아가고 싶으니까요.

아빠도, 저도 그걸 원하니까요.


아빠, 내 말 들려? 혹시 듣고 있으려나?

이럴 줄 알았으면 종교를 가져볼 걸 그랬나. 아니면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라도 가져볼 걸 그랬다.

아냐 아냐. 그냥 나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내 방식대로 할래.

아빠, 어디에 있든 평온하길 바랄게.


아빠, 늦었지만, 너무너무 늦었지만 이 말 꼭 하고 싶어!

안녕, 잘 가! 편히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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