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 밥은 먹고 다니니?

by 하루오

밥맛없다. 사전적으로 ‘하는 짓 따위가 불쾌감을 주어 상대하기 싫다’로 정의된다.


밥맛이다. 사전에 등재되지 않았지만 대체로 ‘밥맛없다’와 같은 의미로 활용된다. ‘없다’와 ‘이다’가 반의 관계는 아니지만 ‘존재하지 않다’를 뜻하는 ‘없다’와 ‘사물을 지정’함으로써 존재를 규정하는 ‘이다’는 직관적 의미 관계는 극단이다. 극단이 하나로 포개지는 아이러니를 밥은 한 그릇에 담아낸다. 그냥 밥이다, 밥. 밥이나 먹고 생각하자.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고,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려서 밥은 보편 윤리다. 그래서 공깃밥은 오래도록 1,000원이었다. 여름철 계곡의 바가지 장사들도 공깃밥만큼은 1,000원에 팔았다. 공깃밥 기준 210g으로 만들어진 즉석밥이 1500원~1700원으로 값이 오르는 동안 공깃밥은 그릇의 크기를 줄이거나 담는 밥 양을 눈속임할지언정 감히 값을 올리지 못했다. 공깃밥 1,200원은 쩨쩨하고, 1,500원은 인정머리 없어 보였다.


‘공깃밥 1,000원’은 엄마 같다. 사적 세계 최고 존엄 엄마는 공적 세계에서 ‘집에서 밥이나 하는 아줌마’로 가치 할인 당한다. 나는 엄마가 있는 부엌에서 은색 압력밥솥이 ‘칙칙’대는 풍경을 먹고 컸고 엄마는 내가 밥을 먹는 풍경을 보며 늙으셨다. 늙은 엄마는 전화 속에서 내게 늘 밥 먹었는지 물으신다. 먼 곳의 엄마에게 이곳의 내 밥이 그곳의 밥이 된다. 나의 밥만큼은 엄마에게 ‘무려 밥’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말하는 ‘밥 먹었니?’의 영어 번역은 ‘Have you eaten?’으로서 아마 생물학적 어미들의 공통 정서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먹다’는 있되 ‘밥’이 없는 지점에서 밥은 한국의 독자적인 의미를 가진다. 밥은 챙겨야 할 끼니이자 맛있어야 할 식사다. 엄마가 당신의 개별성을 지우며 식구를 떠받치는 중심에 서듯 밥은 밥상을 보이지 않게 이끄는 주장(主將)으로서 소리 없지만 차지게 ‘우리’를 주장(主張)한다. ‘see you later.’가 아니라 ‘다음에 밥 한 끼 하자.’는 헤어짐 속에 ‘우리’를 심어둔다. 그래서 엄마가 말하는 밥에는 ‘우리 아들/딸’이 함의되어 있다.


모든 메뉴 역시 밥으로 일통된다. 김치찌개를 먹든, 돈가스를 먹든 ‘밥 먹었다’라고 한다. 밥은 모든 식사의 전제다. 배달 앱 시절 전에 ‘배달료’를 상상하지 못했듯, 김치찌개와 돈가스에 포함된 밥도 언젠가 분리될지 모르겠지만, 그 영역은 자본이 식사에 침투할 수 있는 최후의 인정(人情)일 것이다. 밥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는 맛의 스케치북이다. 하얀 바탕 위에서 맛이 그려진다. 밥이 없으면 김치찌개는 나트륨 폭탄이 탄로 나고, 돈가스는 포만감이 느끼함으로 더부룩해진다. 밥은 자극을 중화하며 맛의 핵심 부피를 키우는 것이다. 50,000원짜리 한정식에서 코스 한 두 개가 빠지면 값을 깎으면 되지만, 밥이 빠지면 밥상은 미완이다.


‘나’는 엄마 위에 그려진 어떤 맛이고, 엄마는 내 밥이다. 엄마는 언제나 내게 졌다. 세상에서 가장 만만한 내 편이다. 이제는 내가 엄마의 경제적 보루지만, 내가 지치고 힘들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여전히 엄마다. 밥 먹었니, 그 말의 진심을 아는 한, 자식을 먹여 키운 모든 아줌마를 존중한다. 밥을 하는 일은 하찮은 것이 아니라 귀찮은 것이다. 귀찮음을 수 십 년 수행하는 것은 귀한 것이다. 공깃밥을 1,000원에 고정하는 편견은 무심하고, 무례하다.


내 엉망진창 식습관에도 불구하고 밥만큼은 성실했다. 13인분 밥솥으로 매끼 1인분씩 밥했다. 계란 굽는 일조차 귀찮은 내게 특별한 일이었다. 매끼 1인분 정량을 챙긴다는 명분으로 10년 이상 끼니마다 밥을 해왔다. 갓지은 밥에 대한 강박은 아니다. 본가에 내려가면 엄마는 한사코 새 밥을 먹이셨지만, 나는 취사 후 48시간 지난 밥도 괜찮았다. 국이 있으면 찬밥도 상관없었다. 그저 밥솥이 나 때문에 온기를 유지해야 하는 일이 빈 집에서 돌아가는 보일러처럼 비효율적으로 여겨졌다. 무엇보다도 혼자 필사적인 온기가 측은했다.


즉석밥은 딱 한 번 먹어봤다. 편의점 도시락에 딸려 나왔었다. 유통 기한이 임박했던 것으로 봐서는 재고 처리를 위해 일시적으로 구성했겠거니 했다. 즉석밥은 나쁘지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다. 당근마켓에서 한창 인스턴트식품을 사 모을 때도 즉석밥만큼은 예외였다. 쌀 20kg에 5만원 남짓하므로 즉석밥은 할인한 들 가성비가 나빴다.


성실함과 정성은 무관했다. 밥할 때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 1인분 쌀을 넣은 솥에 물을 붓고 솥을 빙글빙글 돌린 후 물을 따라냈다. 이 작업을 한 번 더 반복한 다음 새 물을 받아 밥을 안쳤다. 물은 눈대중으로 맞췄다. 수 천 번 한 일이라 틀리지 않았지만 틀려도 괜찮았다. 진밥, 고두밥 가리지 않았다.


쌀은 브랜드가 아니라 품종이 중요했다. 브랜드 쌀이 일관된 품종을 쓰는 경우가 있지만, 그 품종이 내 입에서 특출 난 것도 아니었다. 대체로 품종이 ‘일반’으로 표기된 저렴한 쌀을 샀다. 지역에서 적당히 보관하다가 최근 도정한 것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엄마는 내가 잡곡이나 찹쌀을 섞어 먹기를 바라셨다. 나는 귀찮음으로 무질렀다. 그러자 엄마가 잡곡과 찹쌀을 섞은 쌀을 보내주셨다. 섞어 먹는 수밖에 없었다.


밥솥도 엄마가 보내주셨다. 쓰던 밥솥이 고장 나서 3만원 남짓한 2인용 밥솥을 산 적 있었다. 어차피 1인분씩만 하므로 큰 밥솥은 공간 낭비였다. 막상 밥솥을 받고 보니 구조상 압력이 부실하겠다 싶었는데, 역시나 산에서 한 밥보다 약간 나은 수준의 밥을 했다. 나는 ‘고작 밥’이므로 대충 먹었는데, 엄마는 내 얘기를 들은 다음 날 13인용 밥솥을 택배로 보내주셨다. 인터넷 최저가로 산 것도 아니고 하이마트에 가서 직접 고르신 것이었다. 새 밥솥이 한 밥은 진짜, 밥맛이었다.


하루오 밥솥.jpg 당근마켓 최초의 판매 물건. 저렴하게 넘겼어요. 제품 소개에 서사적 장치를 활용해 봤었는데, 반응은 좋았네요.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지 않을 즘부터 내 인생은 착실하게 고장나기 시작했다. 이제 몸도 여기저기 고장나기 시작해, 완연한 ‘고작 나’가 되었다. 10년 전, 20년 전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나를 그렇게 망쳐 놓고 밥이 넘어 가느냐고 따지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나, 내 밥은 누군가의 ‘무려 밥’이어서 참 잘 넘어가는데. 10년 후, 20년 후 더 보잘 것 없는 내가 되겠지만, 그만큼 ‘밥’을 먹었다면 되었다. 내가 먹은 것들을 기억해야 한다. 밥에서 ‘무려 나’를 볼 수 있는 심력(心力)이 필요하다.

그렇게, 밥은 먹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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