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독사했을 때 내 방은 나를 뭐라고 증언하게 될까? 엄마가 다녀가신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리정돈 정도는 하고 괜찮게 사는데, 1년에 한두 번 엄마 손이 지나고 나면 방이 더 괜찮아졌다. 손닿지 않는 곳의 먼지들, 냉장고 바닥에 흘린 김치 국물 자국, 싱크대에 적당히 쌓인 설거지 거리를 엄마는 참지 않으셨다. 엄마 손이 닿지 않은 내 방은 그 반짝임을 증언하지 못할 것이다.
방은 타인이 배제된 공간이므로 개인의 내면이 적나라하게 반영된다. 자신을 포장하려는 의지가 0%에 수렴하는 가장 솔직한 유서인 셈이다. 쌓인 설거지 거리는 내 내면에서 방치된 나를 실토하는 듯했다. 씻어내야 할 것을 씻어내지 않은 나는 구질구질했다. 귀찮아서 미뤄둔 시간이 어느덧 내 인생이었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 고로, 나는 요리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설거지 거리를 줄였다. 별 것 아닌 뒤처리가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숙제는 생략하는 쪽이 합리적이었다.
주부는 먹고 나서 설거지하지만 자취생은 먹기 위해 설거지한다. 그리고 나는 한 달에 서너 번쯤 설거지를 한다. 여름에는 악취가 날 법도 하지만 늘 창문을 열어둬서 그런지 냄새 문제는 없었다. 햄 굽는 것도 귀찮아 스팸도 숟가락으로 토막 쳐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판에 설거지는 무슨. 비위생을 몸으로 감당한다. 귀찮음을 상쇄코자 일회용품을 남용하지 않는 양심으로 밀린 설거지에 당당했다.
매 끼 설거지 거리라고는 밥그릇으로 쓰는 국그릇 하나에 수저 한 벌과 전자레인지에 햄을 돌릴 때 쓴 접시, 후식으로 마신 믹스 커피 탄 컵이 고작이다. 간혹 3분 카레를 비벼 먹은 대접, 라면 끓인 냄비와 라면 덜어 먹은 그릇, 밑반찬 하나를 다 먹으면 반찬 통이 추가되는 정도다.
보통 사용한 그릇에 물을 담아 놓고 식사 때마다 다시 헹궈 사용한다. 헹군다는 것은, 수도꼭지에서 분사되는 수압을 빌어 그릇을 2~3초 샤워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수저도 앞뒤 1초 컷이다. 그 정도면 이미 불어 있던 밥알이나 고춧가루가 대충 제거된다. 이 과정의 핵심은 내 손에 물 묻히지 않는 것이다. 간혹 그릇이나 대접 테두리에 고춧가루나 카레자국이 굳어 있지만 먹는 데 지장 없으면 괜찮다. 며칠 묵어 물때가 미끌거리면 손으로 문대는 수고 정도는 더한다.
기름 묻은 냄비와 접시도 다시 쓴다. 라면을 끓였던 냄비도 물을 채워 뒀다가 사용할 때 한 번 헹구면 그만이다. 물에 기름기가 떠 있지만 스프를 넣으면 국물로 흡수된다. 세균이든 바이러스든 끓는 물에 죽을 테니 위생에는 문제없다는 식이다. 계란프라이를 올렸던 접시는 물로 헹궜다가 물이 마르면 기름기가 꾸덕꾸덕해진다. 그 위에 새 계란프라이를 올리는 것은 나도 찜찜하지만 귀찮음을 넘어설 정도는 아니다. 아직 장염이나 식중독에 걸린 적이 없는 것을 보면 내 소화기는 제법 튼튼한 모양이다.
그래도 기름기는 찜찜해 그릇에 기름기를 묻히지 않으려 노력한다. 설거지 직후에는 계란프라이를 밥 위에 올린다. 햄은 밥그릇에 담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그 위에 밥을 얹어 먹으며 밥알로 기름기를 닦아낸다. 완벽할 수는 없어도 설거지를 미루는 데 도움은 된다.
쌀뜨물은 든든한 지원군이다. 나도 꽤 모순적인 게, 설거지는 귀찮으면서 밥은 끼니때마다 1인분씩 한다. 2-3일치를 한 번에 해도 되지만 식사량 조절이 애매해 계량컵을 기준으로 1인분씩 먹을 만큼 밥을 하는 것이 습관으로 굳어졌다. 쌀뜨물을 기름기 묻은 것에 우선 분배했다. 쌀 부유물이 기름기를 빨아 들였다. 두세 끼 쌀뜨물이면 기름 때문에 포기했던 그릇이나 접시가 그럭저럭 부활했다.
프라이팬은 숙적이다. 이 녀석이 등장하면 설거지를 할 수밖에 없어서 어지간하면 안 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계란프라이(나중에는 이마저도 귀찮아 계란을 몽땅 삶았다.)를 하거나 3분 짜장에 비벼 먹을 양배추, 양파를 볶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쓰게 된다. 가능하면 사용 직후 온기가 남아 있을 때 휴지로 닦아 보관하는 방식으로 설거지를 때운다. 그러나 고기나 생선을 굽는 경우가 1년에 여남은 번은 생기는데, 이건 휴지나 쌀뜨물로 해결되지 않는다. 고기나 생선은 반드시 설거지 직전에 먹었다.
돌이켜 보면, 설거지의 합리성은 뇌의 합리성이지 나의 합리성은 아니었다. 인간은 평균적으로 3개의 고통을 만회하기 위해 1개의 쾌락이 필요하다고 한다. 고통에 민감함으로써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뇌의 프로세서다. 수렵 채취의 야생 시절에는 적절했을지 모르나 문명의 시대는 비만 유전자처럼 불리하게 작동했다. 삶은 죽음의 여집합이 아니다. 싫은 것의 여집합이 주는 평온은 내 밥상처럼 생기가 없다. 설거지가 미뤄지는 동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무참히 생략되었을 것이다. 최소한, 계란은 삶은 것보다 프라이가 더 좋았다. 생기 없는 평온함에 중독되어 있는 동안 내 인생은 설거지 거리가 되어 있었다.
자취는 인생의 간이역처럼 여겨진다. 대학을 졸업하면, 직장을 구하면, 결혼하면, 좀 더 번듯해질 것을 기대하며 잠시 머물다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잠시의 순간도 이미 인생이었고, 잠시들은 미뤄지면 설거지 거리로 쌓인다. 내 싱크대는 고도만 기다리던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몸싸움을 벌이고 떠난 난장판이어서 내 인생은 난삽한 기다림이었다. 기다림 끝에 맞이하는 것은 떠나가 버린 고도의 여백이다. 고도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다.
싱크대 위에서 깨진 유리창의 법칙을 발견한다. 지저분한 것들에 조금씩 나를 양보하는 습관이 나를 아무렇게 대해도 괜찮은 존재로 만든다. 내 고독사가 말해주는 것은 방치되어도 괜찮은 시간이 끝났다는 담담한 명제다. 그 증언을 엄마는 길길이 부정하시겠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으실 테니 답답하실 것이다. 그래서 죽기 전 인터넷 검색 기록과 야동을 지우는 기분으로 일주일에 두 번쯤 개과천선 중이다. 행복해서 웃기도 하지만 웃어서 행복한 것이 뇌의 정밀하지 못한 프로세서다. 소소하게 빛내다 보면 귀해지지 않을까, 내게도 내가.
(작년에 게시했던 글인데 절반 넘게 고쳐 써서 다시 업로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