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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Jan 05. 2024

혐오2 - 담배꽁초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이 권리라니, 흡연권은 모순된 어휘다. 다행히 이 미개한 모순은 인류의 지성화에 따라 계몽되어 흡연율이 떨어지는 중이다. 단, 내 생에 계몽이 완료되지 않을 것 같아서 억울하다. 일방적 피해자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으므로 가해자를 혐오할 권리 정도는 인정하길 바란다. 흡연자에 대한 비흡연자의 혐오는 사회적으로 다듬어져 배려의 탈을 쓸 뿐이다. 솔직해서 죄송하다.


이 개새끼들아.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다. 아침 8시를 전후한 출근길, 어제가 버린 쓰레기를 관통한다. 대학 상권 중심가 아스팔트 바닥에 담배꽁초가 비듬처럼 흩뿌려져 있다. 담배가 기호품인 것에 동의할 수 없고, 담배를 피우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마당에 버려진 담배꽁초에 관대할 리 없었다. 아직 어제를 끝내지 못한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그 손에 들린 담배꽁초가 틱, 바닥에 버려질 때, 나는 초법적 인간이 되고 싶었다. 청소부들이 합법적으로 담배꽁초를 쓸어 모았다. 무례를 쓸어 담아야 하는 청소부도 차라리 흡연자이길 바랐다.


밤 10시 전후한 퇴근길은 숨쉬기 힘들었다. 실내 흡연이 금지되자 흡연자들은 술집 앞에서 담배를 피워댔다. 담배연기는 여기저기서 산발하고 이합집산 하며 길바닥에 납작하게 달라붙었다. 특정 구간에서는 숨을 참기도 했다. 봄마다 미세 먼지의 중국에 분노하는 마음을 퇴근길에 가져야 하는 것은 부당했다. 혐오는 나 자신도 아프다. 그들이 내는 세금과 그들이 지급받을 의료보험료의 산수를 정부에서 정부가 압도적으로 흑자를 내길 바랐다.


흡연은 더럽다. 흡연자와의 키스는 재떨이 핥는 것과 같다. 유명 배우들의 흡연 장면이 연출하는 퇴폐미는 얼굴값의 변용이다. 얼굴값이 없는 흡연은 꼴값이다. 꼴값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태는 문화적이다. 한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도 문화였다. 인간은 다수 속에 자아를 숨길 수 있을 때 수치심을 잃는다. 길가에서 흡연하는 모습을 쪼그려 앉아 똥 싸는 모습으로 치환해서 상상하면, 인류는 스마트폰 쓰는 원숭이나 다름없었다. 생명권은 존중하되, 인권은 글쎄다.


흡연자들이 머문 자리는 구체적으로 더럽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며 침을 뱉었다. 멀건 침을 뱉기도 했고, 가래침을 뱉기도 했다. 가래를 긁어모으며 ‘캬악, 캬악’ 될 때, 소리에도 질감이 있다는 사실이 축축하고 끈적끈적하게 느껴졌다. 느끼고 싶지 않았지만 그 길을 관통하는 한 내게 선택지는 없었다. 담배꽁초에 침과 가래가 드레싱 된 바닥을 보노라면, 위생을 떠나 역겨웠다. 이 길을 관통하는 동안 연기를 마실 수밖에 없듯, 침을 밟았을 것이고, 담뱃재는 내 옷과 살에 내려앉았을 것이다. 담뱃재를 공중에 터는 일에 일말의 죄의식도 없어보였다. 내가 타인의 오물을 뒤집어 쓸 만한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글쎄다.


어쩌면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담배 그 자체의 문제인지도 몰랐다. 군복만 입으면 멀쩡한 남성도 ‘군바리’가 되어 풀어지듯 담배가 윤리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담배꽁초 투기, 침 뱉기, 재 털기가 종합되는 부덕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흡연이 아닌 곳에 이렇게 상습적이고 집단적으로 무질서해지는 경우는 드물 듯했다. 흡연하지 않을 때, 그들도 어쩌면 멀쩡한 시민일 것이다.


오십 보, 백 보, 아니 이백 보쯤 양보해서 담배를 피울 수도 있다. 칼로리와 나트륨이 맛과 비례해서 원숭이들은 제 몸에 나쁜 것에 열광했고, 나는 혈압 약 먹는 뚱뚱한 원숭이였다. 담배에는 내가 모를 맛이 있을 수도 있다. 흡연 공간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회가 기호품으로 인정한 이상 취향으로 존중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담배꽁초를 길바닥에 버리는 심리는 역시, 역지사지 안 된다. 술 마시다 나왔으면 꽁초를 들고 술집으로 들어가 테이블 아래에 있을 쓰레기통에 버리면 될 일이다. 그리 번거로운 일도 아니고 힘든 일도 아니다. 대체 왜? 아, 당신들이 인간꽁초였던가? 윤리가 타고 남은 꽁다리. 나는 ‘사람이면 사람이냐, 사람이어야 사람이지.’가 좋다.


출근길 아침, 여느 날처럼 쓰레기가 버린 어젯밤 부스러기를 관통하며 인류애를 갉아 먹혔다. 혐오가 미세먼지처럼 가득한 내 마음이 내 자신도 답답했다. 저 망각된 죄의식의 편린들을 무더기로 쌓아 올리면, 그것은 그들의 무덤일까 내 혐오의 무덤일까.


갈수록 탁해지며 뾰족해지는 마음을 슥, 슥, 슥 쓸어주는 것은 연두색 형광 조끼를 입은 청소부였다. 그를 지나칠 때, 그의 콧노래를 들었다. 그는 이어폰을 끼고 별다른 표정 없이, 일했다. 무표정 특유의 뾰로통함 없이 그냥, 일했다. 형광 조끼에 반사되어 안색이 밝았던 것도 같다. 그저 일이었다. 어젯밤은 비질 몇 번이면 별일 아닌 것으로 무화되었다. 정작 내 마음은 매일 담금질 되며 벼려진 언어로 찌르고 베어 혈흔이 낭자한데, 사실은 내부출혈일 텐데, 정작 거리는 흥얼흥얼, 다시 깨끗해졌다.


내 무덤을 쌓아 올린 건 결국 나였다. 나는 내가 만든 무덤 안에 순장된 인간 꽁초였다. 고작 그 비질을 안 해서, 차곡차곡 모아두고만 있어서, 혐오쟁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이가 없어서 픽 웃고 말았다. 잠깐 멈춰 서서 굳이 여러 각도에서 담배꽁초 무덤 사진을 찍으며 비질 소리를 들었다. 딱딱한 바닥을 플라스틱 붓으로 쓰는 소리가 시원했다. 내 관뚜껑이 열리는 듯했다. 초록색 붓이 남긴 글자는 관(棺)이 아니라 관(寬)이 있었다.


늦은 밤 퇴근길, 숨쉬기 힘들 때, 나도 이어폰을 귀에 꽂고 걷기 시작했다. 그가 어떤 노래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노랫말을 흥얼거렸다. 그러면, 이건 그냥 사람 사는, 일이었다. 내 귀를 때리는 기타 리프 저 너머에서 그의 비질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니, 들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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