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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Dec 29. 2023

혐오1 - 잔반

내 몸이 음식물 쓰레기통은 아니잖아요?


사실이다. 그래서 당신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고 싶다. 음식물 쓰레기의 바닥없는 깊이 속에서 허우적대며 당신도 느꼈으면 좋겠다. ‘쓸모’가 이유 없이 폐기되는 무력감을. 더군다나 잔반은 모두, 한때 생명이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랫말은 지구를 향한 기만이다. 지독한 인간중심주의적 자기도취는 뻔뻔하다.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의 민폐, 기생충, 암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확산은 주변 생물 멸종의 역사였고, 산업 혁명과 인구 폭발 이후 더 난폭해졌다. 인간 소멸이야말로 지구 생명체의 공리를 증대시킨다. 특히 잘 먹고 잘 사는 선진국 인간은 존재 자체가 지구의 원죄고, 죄인이 너무 많다.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다면, 쇼핑이 즐겁다면, 골프가 취미라면, 쇠고기가 사랑스럽다면, 3층도 꼬박꼬박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면, 당신의 죽음은 지구의 축복이다. 인간은 존재한다, 고로 탄소를 배출한다. 타노스는 옳았다.


인류는 최근 원죄를 씻을 기회를 놓쳤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도 너무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다. 크고 작은 전쟁으로도 몇 십만 명밖에 죽지 않았다. 내게 가장 쓸모없는 존재가 타인이라는 ‘사실’은 인구 과잉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착각’으로 무마된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대부분의 인간은 잉여다. 사랑의 범위는 제한되어 있으므로 인류는 상호 잉여성으로 연대된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한다. 감히, 살아가며 존엄하니.


태어난 이상 존재를 유지해야 하므로 동족 중심 가치관은 별 수 없다. 최상위 포식자로서 인간이 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 정도다. 다른 생명체를 죽여 먹는 건 죄가 아니다. 문제는 잔반이다. 먹고 먹히는 것은 생명 순환 고리일 뿐, 사과, 배추, 밀, 벼, 닭, 돼지, 소는 버려지려고 태어난 것이 아닐 것이다. 생명을 쓰레기로 환원하는 윤리 감각에 동의할 수 없다.


한식의 밑반찬 문화는 음식 남기는 것이 전제되다시피 한다. 어떤 메뉴를 주문하든 메인메뉴가 나오기 전, 밑반찬이 테이블을 채운다. 이미 공기밥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내가 다시 먹을 집밥은 문제 되지 않지만, 식당은 아니다. 내가 먹지 않는 것들은 내가 떠난 후 쓰레기가 된다. 죽어서도 먹히지 못하는 생애사가 가련하다. 대상의 윤리적 가치를 폄하한 가해자의 ‘맛있다’가 참, 꽃 같다.


일반 식당에서의 잔반은 구조적 문제라고 변명할 수 있지만, 학생 식당이나 뷔페에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퇴식 트레이에 남은 음식들이 꽤 많다. 멱살이라도 잡고 묻고 싶다. 그렇게 남길 거면 대체 왜 퍼 담은 건가? ‘먹을 만큼’은 초등학교 1, 2학년 바른생활 아닌가? 식재료를 생산한 농부, 어부, 축산업자에게 감사하자는 것도 아니다. 불평등과 별개로 그들은 노동의 대가를 지급받았다. 눈앞에 있는 확실성인 ‘쓸모’를, 무단으로 ‘무쓸모’로 생산하지 말자는 거다. 고작 지구 쓰레기 주제에, 건방지다.


음식을 남기지 않는 것은 생명에 대한 예의다. 인간의 생존 때문에 죽었다면 그 목적이라도 달성되어야 했다. 동식물의 생존은 처참했다. 인간 필요에 의해 유전자 단위로 디자인 되어 필요를 기준으로 관리되었다. 닭은 지구상에 가장 많은 조류지만, 수명은 한 달 안팎이었다. 수평아리들은 태어나자마자 분쇄되었다. 젖소는 임신과 출산을 반복했고, 새끼는 엄마 젖은커녕 엄마로부터 분리되었다. 밀과 쌀은 농약 없이는 생존하기 힘든 인간 의존적 작물이 되었다. 유린된 생명을 다시 농락하는 것, 잔반이다.


나는 잔반을 남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가 던 밑반찬은 먹어서 책임졌고, 주인이 내준 밑반찬은 나트륨을 감당 가능한 수준에서 최선을 다했다. 복국을 먹으러 가서 복국이 나오기 전에 밥 없이 전투적으로 밑반찬을 먹어 치우는 것도 남기지 않으려는 의무 수행이었다. 요즘에는 어묵과 쥐포를 빼달라고 하는 것으로 의무감을 덜었다.


“아이고, 다 드셨네. 감사하구로.”

이모님들은 내가 먹고 난 자리를 좋아하셨다. 청국장 집에서도 여섯 개 밑반찬과 청국장을 다 먹고 계산할 때, 사장님은 함빡 웃으시며 같은 말을 하셨다. 음식을 남기지 않는 것은 음식을 만든 사람에 대한 예의이기도 한 것이었다. 나 역시도 감사했다. 1~3인분 사이의 상차림 노동량은 거의 비슷할 텐데, 나는 늘 1인분만 주문했기에 비효율적인 손님이었다. 내가 생산한 감사와 내가 소비한 감사를 모아 생명이었던 식재료에게 조의를 표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무의미를 가늠할 줄 아는 상상력이다. 나는 많은 죽음 위에 서 있다. 그 죽음의 양과 의미에 부합하는 가치가 ‘고작 나’다. 인간으로 태어난 덕분에 누리는 호사가 민망하다. 가장 맛있게 실천할 수 있는 의무도 지키지 않는 인간이 권리라니? 지성화가 덜 된 시절에는 신이라도 발명해 상대적으로 겸손하고 감사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인권이 발명된 이후, 인간답지 않은 인간도 인간 취급해야 했다. 인권을 두른 인간은 자본주의를 섭취하며 ‘내 돈 내고 산 음식을 내가 남기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며 부덕에 당당했다. 그 자본주의에 의하면 인간은 지구에 공급 과잉 상태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나는 이 말이 좋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종종 등장하는 신념이 뒤틀린 악당 같은 나야말로 인류의 잔반인 듯하다. 진짜로, 버려진 음식의 원한들이 복수를 위해 몸을 필요로 한다면, 내 몸을 기꺼이 빌려주겠다. 복수의 첨단에 설 수 있다면 주술이 회전되며 오레와(おれは)…… 훗, 비로소 꽃의 시간이다. - 영역전개, 분리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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