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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Dec 15. 2023

구멍난 양말을 버릴 때

1%도 안 되는 표면적이 전체를 장악한다. 멀쩡한 99%는 한순간에 식민지처럼 정체성을 잃는다. 오직 구멍이다. 비정상이다. 빼앗긴 정상에 봄은 오지 않을 것이다. 내 인격 전체가 이에 낀 고춧가루 같은 구멍의 중력장을 빠져 나가지 못한다. 신발 벗을 일이 생길 때의 수치심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래서 구멍 난 양말을 버리기에 여전히 탱탱한 발목 밴드가 측은하다.


닳아가는 징조 없이 느닷없었다. 엄지발가락 끝도 아니고 발바닥 측면이었다. 마찰이 덜 한 부분이 먼저 헐어버린 물리적 사연은 궁금하지 않았다. 내 걸음걸이에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었고, 우연히 씹힌 돌이 날카로웠을 수도 있었다. 혹은 미세 외계인이 침략한 흔적일 수도 있었다. 뭐가 됐든, 한 켤레 1,000원짜리였다.


양말은 지하철역 입구에서 비정기적으로 좌판을 까는 할머니한테서 1년에 두세 번 샀다. 할머니는 양말, 스타킹, 때타올, 면봉 같은 가벼운 것들을 돗자리에 넓게 펼쳐 놓고 손님을 기다렸다. 기다림뿐인 부피는 물리 공간에 난 구멍 같았다. 어떤 중력도 유발하지 못하는 구멍은 존재를 생략시켰다. 다 팔아도 내 일당의 반도 남기지 못할 듯했다. 할머니가 골라 온 양말의 무난함은 내 무난함과 달랐지만 신발 속에 있는 양말은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그래도 검정색 양말은 제일 무난해 주로 수업할 때 신었다.


벗은 양말의 바닥은 왁스칠 하던 초등학교 교실 마룻바닥처럼 반들반들 윤이 나되 낡아 있었다. 직물 사이에 땀과 먼지가 압착된 탓이다. 악취는 나지 않았다. 본래 발 냄새가 나는 편도 아니거니와 공부방에서는 신발을 벗고 있었고, 신발은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한 크록스여서 발은 대체로 환기 중이었다. 구멍은 낡은 검정에 뚫린 주둥이 같았다. 양말이 하고 싶은 말, 어쩌면 살려주세요, 침묵할 테니 이 주둥이를 꿰매주세요.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바느질을 못했고, 나 역시도 내 무언가를 좀 더 촘촘하게 꿰매고 싶었다. 문득, 나는 구멍투성이였다. 양말에 남은 내 발바닥의 미지근한 온기로 내 얼굴이라도 닦은 듯 찜찜했다.


양말을 벗는 시간은 낡은 검정에 난 구멍 같았다. 벗은 양말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멍했다. 구멍은 한없이 검정에 가까운 검정이었다. 씻어야 하는 건 알지만 만사가 귀찮았다. 노트북 앞에서 무의미한 클릭을 이어갔다. 검정에 가까운 검정 속에서 죽음에 가깝지만 죽음일 수 없을 만큼만 쉬고 싶었다. 하루 종일 뒤엉킨 색들은 잡스러웠다. 내일은 내일의 색이 있었고, 나는 그 색에 맞는 끼를 내놓아야 했다. 색-끼의 반복을 검정으로 뒤덮고 시치미 땐 채 쓰읍~ 하, 쓰읍~ 하. 비가 오고, 음, 아기는 흘러갔다. 생각할 당신이 없으므로 맨발의 청춘은 와다다다다다다다 그야말로 ‘무야호’의 출구다. 무야, 호, 나는 대관령이 좋아, 신선하고 깨끗한 이 맛, 맛, 맛, 맛, 놀랍게도 대관령 우유는 단종 되지 않았다. 생각의 숨구멍이 쓰읍~ 하, 쓰읍~ 하. It’ raining girl, 할렐루야, 클릭, 클릭, 클릭. 클릭이 헛돌았다. 하루오 씨 밥 세끼 꼬박꼬박 먹이는 이왕지사(已往之事)는 멋, 멋, 멋, 멋도 없었다. 놀랍게도 나는 단종 되지 않았다. 역시 이왕지사(李王之史) 세조다. 쿠데타의 총구처럼 양말의 구멍이 나를 겨눴다. 한없이 하양에 가까운 하양을 요청하지만, 나는 바빴다. 매년 봄, 가을 한 달에 서너 번 하양(경북 경산에 있는 읍)까지 자전거를 타곤 했지만 올 가을은 월급으로 된 구멍으로 기억이 깜깜했다. 벗어 놓은 양말은 망연자실할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시시한 투쟁의 검은 깃발 같았다.


나는 나를 기우고, 누비고, 땜질하고, 덧대고 보충해 왔다. 너덜너덜하지만 아등바등 멀쩡한 척하고, 타인의 너덜너덜함을 모른 척해줬다. 수습되지 않는 구멍도 있었다. 나는 이미 매일 3알의 약으로 하루치의 정상을 꿰맸다. 유튜브나 릴스로 구멍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고 있지만, 인생의 숨통이 조여지고 있는 것을 안다. 구멍이 더 커지고 있거나,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점점 삭아가며 구멍이 예비 되고 있을 것이다. 잘 되어봐야 거적때기 같은 인생, 버리고 새로 신을 수 있다면 진작 버렸다. 버릴 수 없으니 버텼다. 씻기 귀찮아 벗어둔 양말을 보며 클릭, 클릭, 클릭. 바느질 배울 생각은 없었다.


사형 선고는 간단했다. 클릭을 이어가다가 그냥, 쓰레기통에 던졌다. 노골이 되었지만 잠시 후 리바운드해서 기어이 버릴 것을 안다. 이래도 되나 싶지만 할 수 있으니 할 따름이었다. 양말 20켤레가 대기 중이었다. 작년에 배송비 무료에 10,000원에 샀다가 지하철 역 앞 할머니에게서 산 양말을 소화하는 동안 그대로 보관 중이었다. 버릴 때, 양말보다 조밀하지 못할 나는 왜 쓰레기가 아닌가를 묻지 않았다. 어쩌면, 진실을 묻는 건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구멍 난 양말보다 예쁜 사람은 몇이나 될까. 우리가 보잘 것 없다는 진실은 한없이 검정에 가까운 검정에 묻어 둘 뿐이다. 멍, 멍, 멍, 멍, 멍, 멍, 멍, 멍, 멍, 구멍이다. 그런 개소리다. 한없이 검증해도 검증되지 못할 하양에는 사실 갈 생각이 없었던 거다. 바쁜 건 핑계고. 내 나이는 몇 개고?


양말을 버릴 때 미안했다. 혼자 살아남아서, 또 살아갈 거라서. 살아 있어서 부끄럽다. 비겁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바느질할 거다. 다행히, 혹은 뻔뻔히, 나는 1,000원보다는 비싸니까. 단, 순장당한 99%의 억울함은 기억해 둘 것이다. 내가 진 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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