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도 되지만 있어야 개운한
겨울은 쉽게 갈라진다. 공기가 메마르며 피부가 거칠어진다. 거칠어짐은 가려움을 호명한다. 참으면 사라질 가려움에 나도 모르게 대응한다. 굳이 참을 필요 없어서 결코 참아지지 않는다. 긁다 보면 피가 맺힌다. 가려움은 피부 표면이 아니라 몸속에 올라온 갈증이다. 긁다 보면 갈증을 이해한다. 겨울이면 팔과 다리가 상처투성이로 변한다. 보습제로 해결될 문제를 또, 굳이 해결하지 않는다.
가려움은 보호 본능 신호다. 신경은 피부를 기어가는 벌레를 털어 내기 위해 과민하게 진화했다. 피부가 거칠어지면 각질층이 갈라지고, 표면이 거칠어지면 작은 틈이 생긴다. 이때 히스타민이 신경을 자극한다. 긁으라고, 알아차리라고, 가려움은 몸속에서 허공으로 외치는 소리 없는 엄살이다. 손으로 문질러 봐야 소용없다. 피부와 다른 물성과의 날카로운 마찰로만 씻어낼 수 있다. 손톱을 세운다.
과하면 강박이다. 손톱은 존재함으로써 손끝을 보호하지만, 날을 세우면 긁고, 찍고, 찢고, 할퀴고, 후벼파 공격하므로 긁음의 뿌리는 자학이다. 가려움은 통증을 유도하고, 통증은 가려움을 밀어낸다. 가려움과 통증은 같은 신경 회로를 지나기에 몸은 벌레가 기어가는 환상에 쉽게 속는다. 속아도 시원해지므로 손해 볼 수 없는 맞교환이다. 그러나 겨울에는 긁어낸 도파민과 피의 공리가 엉망이다.
참으면 히스테리다. 신경이 견디지 못하는 감각을 억누를 때, 억제된 신호는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긁지 않겠다는 의지가 신경을 더 예민하게 만들고, 가려움은 온몸으로 확산된다. 가려움을 인식하는 순간, 피부를 긁지 않아도 신경이 먼저 꿈틀거린다. 신경은 스스로 가려움을 해소할 수 없다. 참는 동안 감각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스며든다. 참아서 얻은 ‘피부 손상되지 않음’과 ‘시원해질 기회’의 공리도 탐탁지 않다. 긁든 참든, 신경은 고통으로 수렴한다.
등이 가려우면 난감하다. 등에서 양팔을 아래위로 잡을 수 있는 유연한 사람은 몰라도, 나는 손이 닿지 않는다. 몸을 비틀거나 문 모서리에 문대보지만 개운치 않다. 볼펜이나 자로 얼렁뚱땅 수습해서 가려움과 긁음의 평형을 유지한다. 끝장내고 마는 팔다리와 달리 등의 가려움은 어쩔 수 없이 적당히 머물다 사라진다. 등은 무사할수록 손톱이 그립다. 고통으로 수렴하는 시원함은 어쩌면 생의 과시 행위인지도 모른다. 나는 피 흘린다, 고로 존재한다.
세포 단위에서 감각 수용과 해석은 본래 하나의 일이었다. 그러나 배아의 외배엽에서 시작된 신경계는 피부를 신경의 바깥에 배치해 세상을 수용하도록 했고, 감각을 정교하게 다듬기 위해 뇌를 만들며 분리되었다. 피부가 가려우면 신경도 반응한다. 가려움은 피부에 닫힌 감각이 아니라 신경의 기억이자 뇌의 착각이다. 외로울 때 활성화되는 배측 전방대상피질(dACC)은 육체적 고통을 감지하는 뇌의 영역과 같다. 가려움, 고통, 외로움은 같은 신경을 지나며 서로를 증폭한다.
가려움은 기표다. 신체가 만들어낸 모호한 기표는, 긁음이라는 기의를 필연적으로 매달지 않는다. 긁어도 해결되지 않고, 긁지 않아도 가려움은 퍼진다. 기표는 기의를 요청하지만, 기의는 언제나 미완이다. 내가 긁을 때, 가려움은 고통과 외로움 사이를 헤맨다. 자기가 뭘 원하는지도 몰라 투정부터 부리는 아기처럼 일단 긁다가, 미숙아의 난폭한 흔적을 남긴다. 세포처럼, 사람들도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가려움은 해결되지 않는 기표이며, 긁음은 완결되지 않는 기의다.
등의 가려움에서 ‘타인은 지옥이다.’가 철회된다. 허공에 퍼진 ‘긁어줘.’는 타인만이 해소해줄 수 있는 갈증이다. 내 등을 맡길 타인은 아무나일 수 없다. 등은 나의 취약한 부분이다. 어렸을 때는 할머니, 엄마, 아빠였고, 나이를 먹으면 연인, 배우자, 자식일 것이다. 그러나 은둔하지 못하더라도 고립되어 있는 대부분의 1인 가구는 등에 갈증이 고인다. 멀쩡한 등이 가장 큰 환부다.
너와 함께하지 않을 때가 겨울이다. 패딩으로 꽁꽁 싸맨 만큼 내 가려움은 두껍게 포장된다. 건조함은 패딩 안쪽으로 파고 들어 온몸으로 퍼진다. 가려움을 긁지 못해 신경이 더 민감해지고, 신경이 더 민감해질수록 가려움은 실제 이상으로 증폭된다. 진짜와 가짜가 구별되지 않는 지점에서, 환상이 된 가려움은 타인을 요청한다. 내가 긁을 수 없는 환상을 내게 붙여 놓음으로써 생물학적 연대는 타당해진다. 내 손등도 네가 긁어줄 때 우리는 옥시토신과 엔드로핀으로 접합된다. 호르몬은 혼자 채울 수 없는 갈증이다.
몸은 소통의 원천으로서, 가려움은 타인이 변형된 기표다. 내 몸에 타인이 결핍되어 있는 역설이 너를 필연으로 만든다. 가짜 필연이다. 생물학적 환상이고, 환상의 진심이다. 긁지 않아도 살 수 있고, 혼자서도 가려움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을 필요로 하는 감각은 기의 없는 기표로 남겨지지 않는다. 너에 의해 내 이름이 호명될 때, 나는 긁힌다. 우리는 가려운 중이고, 귀찮지만 굳이, 네가 필요하다.
가려움은 나와 너의 갈라진 흔적이다. 피가 맺힌다.